고린도후서 2:14-15 그리스도의 개선행렬에 우리를 포로로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뿌리는 역할을 맡겨주신 것에 감사하며 이 향기는 구원 얻는 사람이나 멸망 당할 사람이나 모두에게 뿌려지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이전 말씀에서는 나는 드로아에 갔을 때 거기서 사역할 기회가 완전히 열려있었지만 디도를 만나지 못했기에 내 영에 안식이 전혀 없어서 마케도니아로 갔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개선행렬에 참가시키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것에 감사한다며 구원 얻는 사람에게나 멸망당할 사람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바로 앞에서는 디도를 만나지 못해 걱정하며 사역의 기회가 열린 드로아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갔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14절에서는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한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전환은 7:5-7절에 나온 마케도니아에서 실제로 디도를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감사의 이유는 우리를 항상 그리스도의 개선행렬에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우리를 통해 어디서나 드러내게 하신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하나님은 항상 그리스도의 개선행렬에 참가시키신다는 확신을 갖고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그림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개역은 14절에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라고 했는데 이것은 원어의 뜻과는 다르게 번역이 되었다. 새번역처럼 그리스도의 개선행렬에 항상 참가를 시킨다는 것이지 이기게 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대부분 바울 일행은 포로로 개선행렬에 참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바울 일행이 포로로 참가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바울의 수치와 죽음이 초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에 초점이 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개선행렬이란 말에서 개선행렬이란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로마의 개선장군의 행렬을 말하는 것이다. 개선행렬에 우리를 참가시킨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로마제국 시대의 개선행진의 모습을 알아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 개선행진의 맨 앞에는 정무관들과 원로원이 가고 그 뒤에는 트럼펫 부는 사람들과 정복한 나라에서 가져온 전리품들이 뒤따르게 된다. 그 뒤에는 희생제물로 쓸 흰 황소 앞에 피리부는 사람들이 간다. 그 뒤에는 정복한 나라의 왕 같은 포로의 대표자들이 장식된 전차를 탄 개선장군의 앞에서 사슬에 매인 채 끌려 간다. 승리한 병사들이 뒤 따라가며 “lo triumphe!” 라고 외치며 따라 간다. 개선장군 만세 라는 뜻이지요. 왕과 같은 포로의 대표자들은 the Capitoline Hill로 끌려 올라가서 감금되었다가 일부는 처형되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려간다. 그 거리에는 향을 가득히 뿌려 그 향기로 축제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된다.
바울은 이러한 개선장군의 행진을 머리속에 그리며 이 단어를 쓰고 있다.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서 승리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개역은 바울 일행인 것처럼 번역했지만 원문이 뜻하는 승리의 주인공은 바울 일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렇다면 바울 일행은 이 개선행진에서 어디 쯤에 있을까? 골로새서 2:15절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골로새서에서는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을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서 구경거리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구경거리로 삼으셨다는 것은 포로로 잡아서 끌고 간다는 뜻이다. 골로새서에서는 개선행진에 참여시킨다는 말의 목적어가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인데 고린도후서 2:14에서는 바울 일행을 뜻하는 “우리” 이다. 따라서 개선행진에 참여한다는 말은 승리자로서 참여한다는 뜻이 아니라 포로로 참여한다는 뜻이 명백하다. 바울은 개선장군인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에서 포로로 잡혀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뒤 항상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 그 이후에는 그리스도만 높이는 삶을 살았다. 따라서 우리를 언제나 이기게 하시고가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행렬에서 항상 포로로 끌고 가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마케도니아에 가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의 조롱거리와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개선행진에 언제나 포로로 참가시키시는 것이 어째서 감사한 일일까? 바울 당시 전쟁포로는 일부는 처형되지만 나머지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의 포로가 되어 있던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신 개선장군이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뒤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 것이다. 포로들 중에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로 고백한 자들은 살려주시고 그리스도의 노예로 삼으셨고 나머지는 모두 멸망하게 된 것과도 같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쓴 여러 편지들의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시작했다. 종이란 노예라는 뜻이다. 전에는 죄와 사망의 포로로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바 된 뒤에는 생명을 얻었으니 포로로 참여하고 있지만 승리한 병사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만세”를 외치며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바울 일행을 포로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나타내도록 시키신 것이다. 바울 일행은 포로이지만 행렬을 따라가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뿌리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마케도니아에서만 아니라 모든 장소에서 그렇게 그리스도의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신 것이다.
어째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포로로 묘사하는가? 바울은 과거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적이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라면 처형을 당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살려주시고 또 향이 담긴 커다란 바구니를 맡겨주시고 그리스도의 행렬의 뒤를 따라가며 향을 흩어 뿌리는 역할을 맡겨주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도 역시 고난 가운데 있던 포로와도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살려주기로 약속을 받았고 대신에 그리스도의 향을 뿌리는 역할을 맡겨주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것 때문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마케도니아로 인도하셔서 고난 중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뿌리도록 역할을 맡겨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5절에서 이 향기는 구원을 얻는 사람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에게나 모두에게 향기라는 것이다. 향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바울 일행을 통해 은은하게 퍼지는 장면을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바울 일행이 뿌리고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는 모두에게 뿌려지고 있다. 이 향기는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포로들에게나 처형당하기로 되어 있는 포로들에게나 똑같이 뿌려지는 향기라는 것이다. 이 향기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개선행렬 안에 있는 모든 포로들에게 향이 뿌려지듯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나 곧 멸망할 자들에게나 다 뿌려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15절에서 향기라는 말은 14절에서 향기라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15절에서 향기라는 말은 원래 구약의 희생제사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향기를 뜻하는 말이다. 바울은 로마의 개선장군 행렬에서 흩뿌려지던 향기에서 이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의 향기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일행이 고난 가운데 마케도니아까지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은 바울 일행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희생제물이 된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신들의 희생을 통해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는 구원받고 고난 가운데서 복음을 증거하게 된 것에 감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