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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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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Word

고린도후서 2:7-9

복음에 순종하라

빛이 새어 나오는 질그릇 · 고린도후서 4장

2026. 9. 23. · 안정섭 목사 · 고린도후서 2장 강해 설교

고린도후서 2:7-9 그러니 반대로 회개한 사람은 용서와 위로를 통해 그 사람이 과도한 슬픔에 삼켜지지 않도록 사랑을 나타내야 하며 이 편지를 쓴 목적도 여러분이 모든 일에 순종하는지를 검증하려는 것이다.

이전 말씀에서는 나를 슬프게 했던 사람은 어느 정도 여러분 모두를 슬프게 했던 것이고 그 사람은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충분한 징계를 이미 받았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사람을 용서해주고 위로해줌으로 사랑을 나타내 보이라는 내용이다.

앞에서 이처럼 그만하면 충분하다 한 것은 이 사람이 징계를 받고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충분한 벌을 내렸다라고 한 것이다. 이어서 7절은 "그 결과" 라는 뜻을 가진 말로 이어간다.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고 본인이 뉘우친 결과 라는 뜻이다. 이는 마치 할아버지에게 대들고 욕한 자녀를 아버지가 벌을 주었을 때 할아버지가 “그만하면 됐다 이제 그만 용서해줘라” 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바울은 자신을 욕하고 공격하던 사람을 고린도 교회 대다수의 성도들에게 도리어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개역에서는 "차라리"로 번역하고 새번역에서는 "도리어"로 번역한 말은 원어에서는 반대로 라는 뜻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더 강한 징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정 반대의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비록 그 사람이 큰 잘못을 했지만 회개했기에 이제는 징계가 아닌 용서와 회복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정 반대로 라는 말을 한 것이다.

용서하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뜻의 은혜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죄수를 석방해주거나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줄 때도 쓰는 말이다. 누가복음 7:41-42절은 500데나리온 빚진 자와 50데나리온 빚 진자가 있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해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라고 할 때도 이 말을 썼다.

이 말은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값비싼 향유 담은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께 붓는 모습을 보고 비난한 바리새인에게 한 말이다. 죄 많은 여인이 많은 죄를 용서받았을 때 예수님께 감사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심각하게 책망한 것은 죄인이었던 여인이 아니라 용서할 줄 모르던 거룩한 바리새인이었다.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마태복음 18:23-35에도 보면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은 이야기가 나온다. 33절에서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라는 말이 나온다.

이어서 35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우리의 엄청난 죄를 용서해 주었으니 우리도 다른 형제를 용서해줘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명령이다. 바울이 용서해주라는 말도 바로 용서 받은 성도가 다른 형제를 용서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무서운 말씀이다.

바울이 자신을 해친 원수를 용서하라는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용서하는데서 멈추면 안된다고 말한다. 바로 그 다음엔 위로해주라고 했기 때문이다. 나를 마음 아프게 한 사람을 용서해주고 봐도 못본척 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더 나아가서 위로하라고 했다. 위로하라는 말은 권면한다는 뜻도 있고 위로한다는 뜻도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2:17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3:2에 보면 디모데를 보내면서 너희 믿음에 관해 위로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따라서 바울이 사용한 말은 권면이 아니라 위로한다는 뜻이다. 이 위로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이지 단순히 달래주는 차원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대적을 용서할 뿐 위로까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위로해주셨기에 우리도 역시 용서하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의 용서와 위로로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7절 끝부분에 개역에서는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라고 번역하고 새번역은 "지나친 슬픔에 짓눌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번역한 말이 있다. 원어는 많은 근심보다는 과도한 슬픔이라는 뜻이다. 원어를 직역하면 이 사람은 과도한 슬픔에 의해 삼켜질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여기서 삼켜진다는 말은 마태복음 23:24절에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라는 말에도 나온다. 이는 악어가 먹이를 한 입에 꿀꺽 삼키는 모습과도 같은 것을 말한다. 또 물이나 음료수를 남기지 않고 한입에 완전히 들이키는 것과도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완전히 삼켜버릴지도 모르는 거대한 짐승은 슬픔이라는 짐승이라는 뜻으로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잘못을 뉘우쳤는데도 성도들이 용서하지 않으면 그 슬픔이 너무나도 커서 슬픔이라는 짐승에게 완전히 삼켜진 바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나친 슬픔에 압도된다는 뜻이다. 지나친 슬픔에 삼켜진 바 되면 낙심해서 아예 신앙에서 떠나게 될 수도 있고 심하면 삶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한 사람은 자신은 회개했으니 이젠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런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지 않으면 그가 슬픔에 삼켜진 바 되어 아예 교회를 떠날 수도 있고 심하면 자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위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도 거져 용서받고 위로를 받았기에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8절 앞에 원어와 똑같이 “그러므로” 라는 말이 생략되지 않고 살아 있다. 그러므로 라는 말은 잘못을 뉘우친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삼켜지지 않게 해야 하므로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에게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길 권한다

여기서 “권한다”라는 말은 앞에서 나온 “위로하다” 라는 말과 원어에서는 똑 같은 말이다. 원어에서는 곁에 라는 말과 부른다는 말이 합쳐진 말이다. 곁에 오라고 부르는 것은 달래주고 위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하라고 권면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 사람을 위로하라는 말은 곁에 부르라는 뜻이고 이번에는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곁에 부른다는 뜻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실천하길 권하고 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므로 권하는 것이나 위로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바울의 위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라”는 원래 이미 맺어진 조약 같은 것을 확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3:15절에는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다. “정한 후에는” 이란 말이 바로 나타내어 보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유언을 작성하거나 계약서를 서로 사인하여 최종적으로 확정지으면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확증하라는 말을 6절의 벌을 내렸다는 말과 연관시켜서 만약 앞에 나온 징계가 벌을 내리는 공식적인 행위였다면 여기서 확증이라는 말도 사랑을 내리는 공식적인 행위이다. 6절에서 벌을 내렸다는 말은 교회 공동체가 다수결로 결정하여 공식적으로 징계를 내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사랑을 나타내어 보이라는 것은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결정하여 사랑을 선물로 내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에 내렸던 벌을 철회하고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9절 맨앞에 원어에는 “왜냐하면”이란 말이 있다. 이는 왜 다시 사랑으로 받아들이길 공식적으로 결정해야 하는가 하면 이란 말이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편지를 썼다고 9절에서 말하고 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 나타내어 보여주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바울이 먼저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했기에 고린도 성도들도 역시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도록 권면하려고 이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바울은 벌을 내리기 보다는 사랑으로 받아주라는 편지를 쓴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성도들이 순종하는지 안 하는지 시험하려고 썼다는 것이다. 개역은 증거라 번역하고 새번역은 시험이라 번역한 말은 원어에서 시험해서 검증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원어에서 9절 끝에 나온 말은 "너희가 모든 일에 순종하는지" 라는 말이다. 따라서 바울이 시험하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받아 주는 것뿐 아니라 모든 일에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시고 가르치신 그 사랑에 순종하는지 시험하여 검증하려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바울에게 순종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결국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 하나를 보면 모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순종의 대상은 누구인가? 어떤 이는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순종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고 복음과 복음이 요구하는 삶에 대한 순종이라고 보면서 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순종과 그리스도의 사도이자 대사인 자신에게 순종하는 것을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바울에게 순종이 아니라 복음의 원칙에 순종이라고 말한다(Plummer, ICC, 61). 두 사람의 견해가 충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순종은 복음의 원칙에 순종하는 것이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사로 행동하기에 실제 상황에서는 거의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바울 개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 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기에 바울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로만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이 먼저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우리 역시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순종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뉘우친 자를 용서하라 하셨는데 용서하지 않고 관심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은 모든 일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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