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2:1-2 나는 또 다시 아픔을 주는 방문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전 말씀에서 나는 내 영혼 위에 하나님을 증인으로 소환한다. 내가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 안에 있기에 믿음을 가르치는 지배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일해야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 돕는 믿음의 동역자가 되려는 것이라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아픔을 주는 방문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2:1절 앞에도 역시 왜냐하면이 있다. 1:24절은 23절에서 말한 내용에 추가로 설명하는 내용이고 기에 23절의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에 안가기로 했다는 것과 연결되는 말이다. 이처럼 1장 끝부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칼빈도 장 구분이 부적절하다고 말한 것이다. 왜 고린도 교인들을 아껴서 안가기로 했는가 하면이란 말이다. 왜 고린도 교인들을 아껴서 안가기로 했는가 하는 말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은 나는 결정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한번 결정했다는 뜻이다.
Harris는 여기서 한번 결정했다는 말이 1:15절의 계속해서 확신하고 있었다는 말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고 했다(Harris, NIGTC, 215). 1:15절의 계속 확신했다는 말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확실하게 결정했다는 뜻이다. 원어에서 바로 이어지는 말은 나자신에게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분명하게 결정했다는 것이다. 1:15절과 연결해서 볼 때 오랫동안 계속 확신하며 생각하고 있다가 한 번 분명하게 결정했다는 뜻이기에 경솔한 판단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결정은 또 다시 슬픔 가운데 여러분에게 가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 이전에 이미 한번 고통스러운 방문이 있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미 한번 가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엄히 책망했다는 뜻이다. 아이를 매로 때리면 아이만 아픈 것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도 아픈 법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엄히 책망했을 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많이 슬퍼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말할 수 없이 슬펐던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가지 않기로 분명히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 첫번째 방문이 언제인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다수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은 방문이 고린도전서를 보낸 이후 짧게 방문한 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를 처음 세울 때 방문한 것은 슬픔의 방문으로 보기 어렵고 또 고린도전서를 보낸 것을 방문으로 보는 것도 문맥상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따라 해석하는 사람들은 처음 교회를 세울 때 방문한 것은 즐거운 방문이고 두번째 방문이 슬픔의 방문이 될 것으로 해석하지만 문맥상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방문 뒤에 어떤 사람이 바울에게 공개적으로 반항했다는 것을 들었다(7:12). 만약 아무 대응도 안하면 바울의 권위는 붕괴되고 반대파가 승리했다고 했을 것이다. 만약 또 직접 방문하며 또 다시 고통스러운 반응이 될 것이고 바울의 반대파가 주장한 바울은 대면하면 약하다는 것을 입증하게 도리 것이다. 엄중한 편지만 보내면 멀리서만 강한 사람(10:1, 10a)이라는 비난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직접 방문하려고 많이 생각도 했지만 또다시 두번째 고통스러운 방문을 피하기 위해 최종 결정은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2:2절 앞에도 왜냐하면이란 말이 있다. 이는 왜 다시는 눈물로 고린도를 방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가 하면이란 말이다. 왜냐하면에 이어지는 내용은 "만약 내가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한다면" 이라는 뜻이다. 이는 만약 내가 또 다시 가서 여러분을 마음 아프게 한다면 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현재형이기에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기에 내가 너희를 슬프게 하는 순간 나도 슬프다는 원리적 진술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원어에서 “나 때문에 마음 아프게 된 사람을 빼놓고는 누가 나를 기쁘게 하겠습니까?"이다. 이 말은 이러한 설명을 분명하게 뒷받침해 준다.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해서 슬퍼하게 되면 바울도 마음이 슬프고 그들이 회개하고 기쁨으로 바울을 맞이하면 바울도 기쁘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 때문에 마음 아프게 된 사람은 바울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웃집 아이가 잘못한다고 매로 때리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자녀가 잘못했을 때 회초리로 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엄히 징계했던 것이다.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징계받은 사람도 가슴 아프고 자신도 가슴이 너무 아팠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는 매로 때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때려서 가르칠 나이가 지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일부는 나를 슬프게 한 그 단수형인 한사람은 2:5-8절에 나온 사람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절대 다수는 나를 기쁘게 할 사람과 나를 슬프게 할 사람이 단수형이지만 실제로는 고린도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회개한 반역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바울을 슬프게 한 사람은 특정 개인이라기 보다는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파당을 나누던 고린도 성도들 전체일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울이 책망한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있지만 아직도 예수님 닮은 삶을 살지 못하고 서로 잘났다고 해서 파를 나눠 다툰 것이다. 저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 하나가 될 줄 몰랐다. 바울이 가서 책망한 것은 믿음이 없다고 책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을 따라 행할 줄 모른다고 책망했을 것이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분명히 있지만 아직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 행할 줄 모른다면 책망해서 될 일이 아니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라고 책망한다면 아직도 다른 형제자매를 동역자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일하는 일꾼이라면 함부로 책망할 수 없다.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책망하면 서로 마음만 아플 뿐이다. 책망으로 씨를 뿌려서는 메마른 땅에서 싹이 나지 않다. 메마른 땅에 씨앗을 뿌리고 눈물로 적셔야만 싹이 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