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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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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Word

고린도후서 1:23-24

나는 지배자가 아니라 함께 기쁨으로 사역하도록 돕는 동역자이다

빛이 새어 나오는 질그릇 · 고린도후서 4장

2026. 9. 18. · 안정섭 목사 · 고린도후서 1장 강해 설교

고린도후서 1:23-24 나는 내 영혼 위에 하나님을 증인으로 소환한다. 내가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 안에 있기에 믿음을 가르치는 지배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일해야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 돕는 믿음의 동역자가 되려는 것이다.

이전 말씀은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도록 확증해 주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우리에게 도장을 찍어 주시고 보증금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래서 목숨 걸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려 한다며 자신은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일꾼이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바울이 쓴 편지는 1977년 김세화의 노래처럼 눈물로 쓴 편지이다. 바울도 실연한 여인들처럼 눈물을 쏟으며 편지를 쓰고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했지만 성도들은 바울을 사랑하지 않고 비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기보다는 서로가 잘났다고 교회 안에서 다투었다. 그러나 바울이 쓴 편지는 후회의 눈물이 아니다. 영적 자녀인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랑을 깨닫고 함께 기뻐하며 감사하길 기대하며 씨를 뿌리는 눈물이다. 이처럼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만이 기쁨으로 거둘 수 있는 것이다.

23절은 그러나 나는 내 영혼 위에 하나님을 증인으로 소환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내 영혼 위에" 라는 표현이 히브리적 표현을 번역한 것이라며 내가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치셔도 좋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번역은 목숨을 걸고서 라고 의미를 살려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전체적인 표현은 헬라적이다. 호머나 플라톤 등에서 신을 증인으로 부르는 헬라적 맹세 습관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인 표현은 헬라적이다. 하나님은 바울의 행동 뿐 아니라 그 마음 속의 동기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기에 하나님이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이어서 고린도 방문을 취소한 이유를 여러분을 아끼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바울이 직접 갔다면 고린도전서 4:21절에서 말한 것처럼 징계를 했을 것이다. 직접 만나면 분노의 감정이 나올 것이고 분명히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고 벌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편지는 다르다. 편지는 직접 징계하며 감정을 드러내기 보다 눈물 어린 호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도 때로는 당신의 자녀들을 매질한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면서 매로 훈계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울도 첫번째 방문 때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매로 훈계하듯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멸시와 냉대와 조롱 뿐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왔다. 돌아와서 생각해보고 이제 다시는 매로 훈계하듯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제 매 대신 편지를 통해 사랑의 눈물로 호소하겠다는 것이다. 바울은 회피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유익한 시간을 주려는 사도적 배려이다.

직접 가서 훈계하지 않겠다고 하자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는 바울이 매를 들 자격이 없거나 매를 들 염치가 없어서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 것이다. 이는 바울 자신의 진심을 믿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고 그 앞에 선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에 진심을 밝히는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자 부모가 매를 들고 때렸는데 자녀가 “왜 때려, 뭘 잘해준 게 있다고 때려!” 하며 바락바락 대드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매를 들지 않겠다고 하자 자녀는 자기 잘못이 없는 줄 아는 것과 같다. 또 부모가 때릴 자격이 없어서 안 때린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바울이 직접 고린도에 가서 책망하지 않기로 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끼기 때문이다. 이미 한번 가서 책망을 했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서로 감정만 상하고 돌아왔기에 이번에는 가서 책망하지 않고 눈물로 편지를 써서 호소하겠다는 것이다.

눈물로 쓴 편지로 호소하는 이유는 24절에 나와 있다. 바울은 “너희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뿐이라” 이기 때문이다. 21-22절에서 사명을 맡기시고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것을 말한 것은 모든 성도들이 아니라 바울 일행에게 그렇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말로 고린도 성도들을 누르고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동역자 라는 것이다. 지배자라고 생각할 때는 매를 들고 때리면서 가르칠 수 있지만 동역자일 때는 매를 들고 때릴 수 없다. 같이 상의하고 안되면 도와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의 정체성은 지배자가 아니라 기쁨으로 함께 일하는 일꾼인 동역자이다. 여기서 바울이 함께 일하는 일꾼이란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쁨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고 한 것이다. 바울이 하려는 것은 책망하여 슬픔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함께 일하도록 돕는 동역자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왜 자신들의 동역자인가 하는 이유를 24절 끝부분에 밝혔다. “여러분이 믿음 위에 이미 튼튼히 서 있다” 라는 말 앞에 원어에는 “왜냐하면” 이란 말이 있다. 왜 동역자인가 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이미 믿음에 굳게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그리스도의 일꾼이 된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개인적인 신뢰일 가능성이 크고 교리적 믿음일 가능성은 적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말은 믿음이 도구라는 의미가 아니라 장소라는 의미이다. 믿음이라는 도구로 서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같은 장소에 있는 신뢰의 관계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소라는 의미로 본다면 13:5절에서 너희 믿음이 진짜인지 점검하라고 한 것과 충돌이 생긴다며 믿음이라는 단어를 도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도구적으로 해석한다면 믿음을 도구로 너희는 굳게 선다는 뜻이기에 13:5절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경우 멀리 있는 13:5절보다 1:24절 자체의 문맥으로 해석해야 한다. 바울은 분명히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동역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왜냐하면 너희는 믿음에 서 있다고 한 것이다. 13:5절은 13장의 문맥에서 해석해야 한다. 13:5절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지 점검하라고 한 것은 13:3절에서 바울이 이번에 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 특정한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지만 1:24절에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킨 말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그들 자신의 것이고 믿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도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믿음이 잘못되었거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책망하기 쉽다. 자신이 전도하고 양육한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 하기 쉽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이 바울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믿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대적하는 것과 그들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들은 바울을 대적하기는 해도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한 위치에 있었기에 믿음에 서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아직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믿을 것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조심스럽게 조언해 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기쁨을 위해 돕는 동역자가 되려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교사시절 교육대학 부속학교로 지정된 학교에서 4년간 근무했었다. 그 때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시범 수업을 하고 학생들의 교안 작성을 가르쳐 주고 작성해온 것을 수정해 주었다. 그들이 수업을 하면 뒤에서 지켜보다가 오후에 잘한 것과 고쳐야 할 것을 평가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학생이 정식 교사가 되어 우리 학교로 왔다면 그 교사는 더 이상 내게 배우는 학생이 아니다. 그렇기에 직접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신임 교사가 아이들을 이해할 줄 모르고 비판하고 책망만 한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이해해야 할지 말해줄 수 있다. 함께 사랑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자고 권면해 줄 수는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자고 할 수는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분명하게 구원은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돌보고 양육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동역자로서 눈물로 예수님의 사랑을 뿌리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함께 기쁨으로 거두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이런 사람들의 지배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조언하며 지배하려 하기보다는 동역자로서 눈물로 권면해야 한다.

우리도 역시 혼자서만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하면 안된다. 나보다 믿음이 약하거나 믿음이 없는 분들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고도 아직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할 줄 모른다면 아직 일할 줄 모르는 것이다. 아직 어떻게 씨앗을 뿌려야 하는지 모르는 농부와도 같다.

누구든지 만약 믿음이 부족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행할 줄 모르는 분들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할 줄 모른다면 정확히 자기 믿음이 제일 좋은 줄 알고 설치던 고린도 교인들과 똑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럴 때는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품고 양육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분들도 자신이 양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품고 눈물로 기도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러면 나중에 눈물로 씨앗을 뿌린 사람은 그들과 함께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쁨의 동역자 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성도를 책망하는 자가 되면 안된다. 목회자라도 다른 성도들을 목회자의 권위로 책망하기 보다 함께 동역자가 되자고 눈물로 권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함께 기쁨으로 거둘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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