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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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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6-7

고난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기회

2026. 9. 8. · 안정섭 목사 · 고린도후서 1장 강해 설교

고린도후서 1:6-7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여러분들도 같은 고난을 견디어내며 하나님의 위로룰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고 이미 고난에 동참하고 있으니 위로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전 말씀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자비와 위로가 항상 넘치시는 분이시고 바울 일행을 온갖 환난에서 위로해 주신 분이시므로 모든 환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위로가 우리에게 넘친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바울 일행이 환난을 당하는 것은 고난 중에 있던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도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며 여러분도 고난과 위로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내용이다.

3-5절에서 바울은 고난을 통해서 위로가 넘친다고 말했다. 이제 6-7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일행이 겪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다며 고린도 교회 지도자들과 아가야 지역의지도자들이 받는 고난도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바울이 말하는 위로는 단순히 말로 위안을 주는 것이나 동정심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겪는 고난과 위로가 이 편지를 받던 사람들에게도 직접적인 유익을 준다는 것이다. 그들도 바울 일행처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위로는 고난 가운데서 영적으로 재충전되어 새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위로는 마치 자동차의 배터리가 충전되는 것과도 같다. 자동차의 배터리는 발전기의 고난을 통해서 충전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발전기가 돌아가지 않으면 배터리는 계속 방전되기만 하다가 결국 자동차의 시동을 걸 수 없게 된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다가 받는 고난은 마치 발전기가 회전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어 영적으로 재충전되게 한다는 것이다. 고난 받기만 하면 저절로 재충전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위로를 받고 재충전된다는 것이다.

6-7절을 요약하여 다른 말로 다시 쓴다면 다음과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다가 돌에 맞아 실제로 죽을 뻔했고 교회들을 생각하며 근심하다가 영적으로 죽을 뻔한 위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고난 가운데 있던 바울을 위로해 주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방전되어가던 바울의 영적 배터리가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충전된 것처럼 역시 영적으로 방전되어가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영적으로 충전되게 해 주려는 것이다.

6절은 고난과 위로를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고난이 먼저고 위로는 고난을 경험한 뒤에 경험하는 것이다. 먼저 6절 앞부분을 보면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라고 되어 있다. 바울과 디모데가 고난을 받음으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위로를 받았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뿐 아니라 바울이 세운 모든 교회들은 다 바울과 그 일행의 고난의 산물이다. 돌에 맞아가며 죽인다는 협박을 받아가며 그렇게 세운 교회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일행의 고난의 결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구원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위로와 구원은 하나의 관사로 묶여져 있다. 마치 “a bread and butter”와도 같다. 관사가 하나 뿐이기에 버터 바른 빵 한개란 뜻이다. 만약 “a bread and a butter” 이라고 하면 버터 한 개와 빵 한 개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로와 구원에는 관사가 하나 밖에 없으므로 “구원받은 위로” 처럼 뗄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 일행이 받는 고난을 보며 저렇게 고난을 통해서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구원이란 거듭남의 구원이 아니고 성화의 구원이다. 바울 일행의 고난을 보면서 자신들도 위로 받고 점점 더 성화되어져 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고난 받는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를 나타내는 현재형이므로 현재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앞으로도 역시 계속 적용되는 진리이다. 이것이 바울 일행이 받은 고난의 의미이다.

다음에 나오는 말은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다” 이다. 고난 다음에 위로가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고난을 받고 난 뒤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나서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일행이 고난 뒤에는 경험한 하나님의 위로도 역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위로를 위한 것이다. 바울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하고 재충전되는 것을 보고 고린도 교인들도 역시 같은 위로를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여러분은 이 위로로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 라는 말은 앞에서 “여러분의 위로” 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말이고 독립된 문장이 아니다. 다수는 여기서 똑 같은 고난이란 바울 일행과 똑 같은 상황의 고난이라는 뜻이 아니라 바울 일행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다가 받는다는 것이 같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이는 모든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에게 준 내용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초점을 맞춰 전하고 있는 것이다.

새번역은 이해하기 쉽도록 원문에서 한 단어를 빼놓고 번역했다. 원어에는 개역처럼 “너희 속에 역사하여” 라는 말이 있다. 역사한다는 말은 두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중간태라면 위로가 스스로 참여하여 효과를 낸다는 뜻이다. 중간태로 해석하여 위로가 효과를 발휘한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수동태라면 위로가 하나님에 의해 작동되며 효과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수동태라는 입장을 선택하는 이들이들도 있고 알 수 없다는 이들도 있을만큼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바울 일행이 고난 후에 받은 위로는 하나님의 위로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 안에 작용하게 하기 위하여 한 것이라는 것이다. 또 이 위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받은 고난과 같은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는 동안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바울과 같은 고난을 경험하게 될까요? 그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역시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고 고난을 받고 그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인내하다가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고난과 위로를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경험하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쓴 것이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받는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묵상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넘치는 위로도 없다.

7절 앞부분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한다” 이라고 했다.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 지역에서 복음 전하면서 고난을 받던 성도들에 대한 바울 일행의 소망이 확정되었다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6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튼튼하게 자리잡았다고 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구원의 확신이 분명하게 확정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미래의 소망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7절 뒷부분에 나온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것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다. 동참한다는 말은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 때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눈 것과도 같은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이 고난과 위로에 함께 동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확실히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해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고난 가운데서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찬양했다. 고난을 통해서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은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하자는 것이다. 저들의 문제는 몰라서가 아니라 고난과 위로를 통해 충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정확히 안 것이다.

고난은 방전된 배터리같은 성도들에게 재충전을 해주는 축복의 기회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하심을 경험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바울처럼 복음 전하다가 고난을 받고 자신이 경험한 놀라운 위로를 통해 충전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끊임없는 위로하심은 고난과는 뗄 수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무시당하던 사람들을 택해서 제자들로 삼으셨다. 지난 주 말씀에서도 제자들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도 무시해서는 안되고 냉수 한 그릇 밖에 대접할 것이 없는 사람들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에서 한참 멀어진 것이다. 주님의 교회는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다. 스스로 종의 모습으로 발을 씻기신 우리 주님을 따라 섬기는 자들이 바로 지도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목회자 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함께 고난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들이 구경꾼이 되어 쇼프로를 방청하는 것처럼 교회에 출석만 해서는 안된다. 모두가 말씀을 배우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받은 뒤 사람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면 고난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견디게 하시는 능력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저절로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다가 고난을 받을 때 우릴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한다. 그러면 고난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견딜 힘을 주셔서 샘솟듯 끊임없이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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