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자비와 위로가 항상 넘치시는 분이시고 바울 일행을 온갖 환난에서 위로해 주신 분이시므로 모든 환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위로가 우리에게 넘친다.
이전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다.
이 부분에서 계속 반복되는 핵심단어들은 고난과 위로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감사가 아니라 찬양이다. 개역이나 새번역 모두 권유형으로 찬송하자 라는 말로 되어 있는데 원어는 “복이 있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서술형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 복이 있기를!" 이라는 소원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하지만 칠십인역 구약성서에서 동일한 표현이 문맥상 소원형으로 읽히는 자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기에 소원형일 것이다.
개역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KJV를 따른 것이다. 하지만 원어를 직역하면 “하나님과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관사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아버지를 따로 떼어 해석해서는 안된다. 하나의 관사로 두 단어가 묶여 있기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새번역처럼 “주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다. KJV를 빼고는 대부분의 영어번역들도 이와 같이 하나의 관사로 묶어 번역했다.
대부분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본래 유대 회당의 전형적인 축복 형식을 기독교적으로 변형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과거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이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분이 어떤 분이신지 3절 뒷부분에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는 먼저 하나님이라고 한 뒤에 아버지라고 했는데 3절 뒷부분은 아버지 라고 한 뒤 하나님이라 했다. 이는 마치 종이위에 물감을 뿌린 뒤 반을 접어 펼친 것과도 같다. 고대인들이 기억을 돕기 위해 쓰던 방법이다.
첫째 “자비의 아버지” 라고 소개하고 있다. 원어는 자비가 아니라 자비들의 아버지 라는 뜻이다. 여기서 복수로 쓰인 자비라는 단어는 반복되는 자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칠십인역 구약성서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히브리적 표현으로 풍성한 자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비로 충만하신 분이시고 자비의 근원이시라는 뜻이다. 자비들이란 예레미야애가 3:22에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비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는 것이다.
둘째 새번역은 “온갖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개역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둘 다 모든 종류의 위로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모든이란 말은 시간을 뜻할 수 있고 종합적이라는 뜻 일 수도 있다. 시간을 뜻한다면 언제나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된다. 몇 가지 영어번역 성경들은 이렇게 해석했다. 또 종합적인을 뜻한다면 종합적인 위로 또는 포괄적인 위로가 되어 개역이나 새번역과 같은 뜻이 된다.
하지만 문맥으로 보면 이는 분명히 모든 시간 즉 항상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 된다. 왜냐하면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라는 말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 라는 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란 자비의 아버지란 뜻인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샘물과 같이 자비가 항상 흘러 넘친다는 뜻이다. 따라서 위로도 항상 끊임없이 흘러 넘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번역도 모든 위로나 온갖 위로가 아닌 항상 끊임없이 주시는 위로가 되어야 한다.
또 4절에서 하나님은 온갖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위로해 주신다는 말은 항상 끊임없이 위로해 주신다는 뜻이므로 온갖 위로나 모든 위로는 항상 또는 언제나 끊임없이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위로한다는 현재분사에 정관사를 붙인 것은 항상 위로하시는 분이고 그분의 본성 자체가 위로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온갖 환난 가운데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라는 말에는 정관사가 있으므로 바울 일행이 직접 겪은 위로를 뜻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모든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말에서 환난에는 관사가 없으므로 이는 모든 사람이 겪을 환난이다. 우리 라는 말이 모든 성도들까지 포함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바울과 동역자들을 포함할 가능성이 있지만 고린도 성도들까지 포함하는 것은 어렵다. 정관사가 있는 것은 바울 일행이 직접 겪은 위로이기에 바울과 함께 한 동역자로 보는 것이 옳다.
위로해 주시는 목적은 모든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4절 뒷부분에 나와 있다. 위로의 도구는 4절 중간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 이다. 이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바로 그 위로를 통하여” 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는 사실은 환난이다.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은혜가 넘치는 것을 경험하고 위로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환난 가운데 위로를 받은 바울 일행은 환난 가운데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위로란 단순히 감정적인 위안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강하게 하는 영적 강화라고 정의하며 이사야 51:12절처럼 하나님의 실제적 개입과 연결된다.
5절은 4절에 딸려있는 절이다. 4절에서 말한 대로 자신들이 환난 당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도울 수 있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 같이” 라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5절은 두개의 짝을 이루는 구절로 비교된다. 두 구절에 똑같이 나오는 말은 “넘친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치는 것 같이”는 바울과 디모데 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흘러 넘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과 관련되어 겪는 고난을 말한다. 절대로 개인적인 관계로 받는 고난이 아니다.
이 고난은 신체적 고난과 영적 고난을 동시에 뜻한다. 신체적 고난은 사도행전 14:19절에 나오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사건을 말한다. 유대인 대적자들이 바울을 돌로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던졌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6:17에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도 역시 이 돌 맞은 사건을 말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 또 영적 고난은 고후 11:28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날마다 내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교회들 때문에 걱정하는 것도 역시 고난이다.
이러한 고난이 자신에게 넘치는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도 넘친다는 것이다.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받는 위로를 말한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를 묵상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큰 위로를 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자신이 돌에 맞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은 잠깐 동안만 고통을 당했지만 예수님은 오랜 시간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죽지 않고 살았는데 예수님은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또 교회들을 위해서 걱정하던 것도 큰 고통이었지만 묵상가운데 모두 큰 위로로 바꾸어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이 위로도 넘친다고 한 것이다. 넘친다는 말은 샘물이 흘러서 넘치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위로는 고난 가운데서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해서 받는 고난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하다가 받는 고난 가운데서 위로가 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샘솟듯 끊임없이 솟아나는 위로가 항상 우리 가운데 흘러 넘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