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1-2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란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간의 화해를 다루었다. 반면에 고린도후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바울 간의 화해를 다루고 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 간의 갈등은 고린도전서를 보내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통해 사랑으로 하나되라고 헸을 때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건방지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있는 지도자에 대한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크리스천 지도자란 당시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존경과 권력 영적 은사들, 수사학적 기교들과 좋은 평판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 같이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주는 후원금을 공손히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도 했을 것이다. 이는 정확히 당시 그리스-로마세계의 세속적인 지도자상이다.
이중에서 특별히 문제가 된 것은 바울은 바울이 후원금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전 9:1-18에보면 자신은 사도로서 당연히 후원금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 라고 했다. 달라고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까지 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일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울의 사역을 후원하려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주인이 일꾼에게 품삯을 주듯 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자신들의 후원을 거절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일부성도들은 건방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저들은 자신들이 지위가 높은 후원자들 이고 바울은 자신들의 도움을 받는 미천한 자라고 생각 것이다. 저들은 세상의 질서에 따라 교회를 다스리고 바울을 지배하려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달라고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한 것이다.
저들의 시각과는 달리 바울은 자신이 후원자 라고 생각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바울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후원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을 통해서 도움을 받는 거지처럼 취급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노예처럼 텐트 만드는 일을 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섬겼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처럼 건방진 바울 때문에 분노한 것이다. 누가 후원자이고 누가 도움을 받는 자인지 서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관계가 어려워진 것이다.
여기에다가 가짜 사도들이 타오르는 불 위에 기름을 뿌렸다. 저들은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배운 적이 없으므로 사도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들은 예수님의 지상사역 때 직접 배웠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진짜라고 했다. 특히 저들은 베드로와 야고보 같은 당시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들의 추천을 받았다고 떠들었다. 그러면서 바울은 가짜고 자신들이 진짜 사도라며 바울을 배척하도록 부추겼다. 저들은 사실 진짜 예수님께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행하시던 기적의 장소에서 기적을 목격한 자들이다. 베드로나 야고보처럼 가장 유명한 사도들의 추천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속임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자신과의 화해를 위해 보낸 편지가 고린도후서이다.
그 중에 첫부분인 고린도후서 1:1-7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는 고난과 위로이다. 바울 일행이 경험하고 있는 고난과 위로를 함께 공유하자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편지의 첫 부분에서 선택한 단어는 고난과 위로인 것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함께 고난 받는다는 서로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고난 받는 것 때문에 함께 위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첫 인사인 1-2절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바울 당시의 편지는 보내는 사람을 먼저 밝힌다. 보내는 사람은 바울과 디모데이다. 먼저 원어의 1:1 맨 앞부분에는 바울 자신의 이름과 사도라는 말이 나온다. 고린도전서1:1의 첫인사에 보면 “부르심을 받은” 이란 말이 있는데 고린도후서1:1 맨 앞에는 이 말이 빠져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자신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했지만 이젠 그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뜻에서 그 말을 뺀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첫 부분과 마찬가지로 고린도후서에서도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강조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란 예수 그리스도가 이는 거짓사도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며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을 이간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많은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라고 쓰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 예수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수 라는 단어는 소유격과 여격의 형태가 똑같지만 그리스도 라는 단어는 소유격과 여격이 분명히 다르다며 문맥상 모호해질 수 있기에 그리스도를 먼저 쓴 것이다. 확인해 보면 영어의 "in"에 해당하는 전치사가 나타나면 예외없이 그리스도 예수 라고 순서가 바뀌어 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라고 쓴다면 예수라는 말이 소유격인지 여격인지 불분명해진다면 순서를 바꿔 그리스도를 먼저 쓰는 것이다.
또 디모데를 함께 편지 보내는 자로 소개한다. 빌립보서나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를 자녀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형제라고 소개한다. 형제란 공식적인 동역자란 뜻이다. 다른 곳에서는 자녀나 아들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형제라고 한 이유는 디모데가 이전 방문에서 어려움을 겪었기에 그의 권위를 다시 세워주려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 양육하고 키운 영적인 자녀인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란 말은 구약에서 가져온 말인데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모인 모임을 가리킨다. 교회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고린도전서에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라고만 썼는데 여기서는 함께 받는 이가 추가되어 있다.
함께 받는 이들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다. 아가야란 고린도와 아테네가 있는 그리스 남부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지역은 당시 그리스-로마세계에서 학문과 문화와 오락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미국의 뉴욕과 보스턴과 라스베가스를 합쳐 놓은 곳과도 같은 곳이다. 모든 아가야 지역에 있는 성도들도 추가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아가야의 모든 교회들에도 동일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당시 그리스-로마세계의 세속적인 지도자상을 따라 교회 지도자들을 세운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그리스 철학과 수사학에 능하고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면 신앙과 상관없이 교회 지도자들로 세웠던 것이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를 언급한 뒤에 인사말이 2절에 나온다. 인사말의 핵심단어는 '은혜와 평화' 이다. 이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기도 한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평화 또는 화해를 뜻한다. 그런데 이 평화의 근원은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은헤와 평화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져 주시는 것이다. 원래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해서 원수가 되었다면 잘못한 우리가 피해를 보상해주고 화해하자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평화하자고 손을 내미신 것이다. 그것이 은혜인 것이다. 따라서 이 은혜와 평화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