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6:1-2 거룩한 자들을 돕는 헌금은 매 주 첫날 각자 형편에 맞게 저축해두어서 내가 갈 때 즉흥적으로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전 말씀은 죽음이 쏘는 것은 죄이고 죄의 권세는 율법이지만 그리스도 를 통해서 승리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주의 일을 넘치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성도들을 도우려는 헌금은 매달 미리 저축해 두라는 내용이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16:1에 나온 “성도들”이란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한다. 원어에서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거룩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일반 성도를 뜻할 수도 있고 목회자들을 뜻할 수도 있다. 사도행전 9:32절과 41절을 보면 일반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사용했다. 원어를 직역한 영어 번역들은 Saints 라고 번역했는데 영어에서는 목회자들을 가리킬 수 있는 말이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의 독자들에게 의미를 살려 전달하려는 영어 번역들은 이를 바꾸어 번역했다. NIV는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Lord's people" 이라고 번역했고 NLT는 "God's people in Jerusalem"으로 번역해서 모든 믿는 자들을 뜻하는 말로 번역했다. 다수의 주석가들도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서신들을 보면 바울은 형제들이라는 표현과 거룩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구별해서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단어가 여러 곳에서 나오는데 그 중 에베소서 1:1에 어떻게 쓰였는지 주목해 보겠다.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 새번역은 NIV 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라고 한 단어로 묶어 번역했다. 하지만 원어는 관사와 접속사로 분명히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되어있기에 “거룩한 자들"과 "믿는 자들”로 구분이 되어 있다. 따라서 거룩한 자들은 에베소에 있는 여러 교회의 목회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 믿는 자들이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바울서신에서 “거룩한 자들”이라는 단어를 문맥을 통해 자세히 보면 “목회자”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바울은 사도라는 단어와 거룩한 자들이라는 단어를 서로 바꾸어 쓴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3:8에 보면 자신을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 라고 한 반면에 고린도전서 15:9에서는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라고 쓰고 있다.
또 로마서 16:2에 보면 바울이 뵈뵈를 추천하면서 한 말의 원래 뜻은 “주의 이름으로 거룩한 사람중의 하나로 여겨 합당한 예우를 하라”는 뜻이다. “거룩한 사람 중의 하나로 여겨 합당한 예우”를 하라는 뜻은 목회자처럼 존중하라는 뜻이다. 뵈뵈가 로마서를 가지고 가서 가르치고 전한 사람이기에 여자라고 무시하지 말고 목회자나 선교사에 맞는 예우를 하라는 뜻이다.
또 로마서 12장 9절 이후를 보면 성도들에 대한 권면이 나온다. 그 중 12:13절의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라는 말에서 만약 “성도”라는 말이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된다. 만약 이 단어가 모든 일반 성도를 가리킨다면 모든 믿는 사람들은 다른 모든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해야 한다. 만약 “성도”라는 말이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면 분명히 앞에 “가난한” 또는 “형편이 어려운” 이란 말이 붙어있어야 한다. 로마서 12:13절에서 권면하고 있는 것도 목회자들이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쓸 것을 공급해주라는 뜻이다.
본래 거룩한 자들이란 말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과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땅 끝까지 복음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에는 땅 끝까지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스데반의 핍박으로 인해 지중해 연안에 흩어지면서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들이 세워진 것이다. 이들 유대인 신자들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죽으심과 부활의 목격자로서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는 살아있는 복음서가 되어 증거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을 거룩한 사람들로 부르던 것이 나중에는 복음 전하는 자를 뜻하는 말로 쓰인 것이다. 물론 모든 본문에서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 서신의 경우에는 대부분 복음 전하는 자를 뜻하는 말로 썼다.
오늘 본문 16:1절의 “성도들을 도우려고 모으는 헌금에 대하여” 라는 말도 역시 목회자들을 돕는 헌금을 말하는 것이다. 앞뒤 문맥으로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전 15장에서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복음 전하자는 내용이고 이어지는 16:5-12은 바울 자신과 디모데와 아폴로를 존중하라는 내용이다. 이는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존중하라는 내용이다. 만약 여기서 헌금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인 구제 헌금을 뜻한다면 갑자기 주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바울은 치매에 걸려서 엉뚱한 소리 하면서 고린도전서를 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도들”이란 “복음 전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이 분명한다. 그렇게 이해할 때 16:1-12절은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된다.
헌금 또는 연보로 번역한 단어는 신구약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는 특별한 목적을 두고 돈을 모으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는 정기적으로 드리는 헌금이나 십일조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다. 파피루스나 비석 등에 남겨진 고대 문헌을 보면 종교적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금이고 세금처럼 의무적이고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이 단어를 쓴 이유는 특별한 목적을 두고 헌금하는 것이고 정기적으로 계속 모금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명령한 것처럼 너희들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갈라디아 교회에도 부탁하고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들에도 부탁하고 고린도 교회에도 부탁했을까? 그것은 사도행전 11:28절과 12:23절에 나와 있다. 그것은 클라우디우스 황제(행 11:28) 와 헤롯 아그립바 1세때(행 12:23) 있었던 예루살렘에 기근 때문이다. 44-48년경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가뭄으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했다. 그 중에서 더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 전하던 사람들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믿는 자들은 자신들도 굶주리던 상황에 있었기에 헌금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복음 전하던 거룩한 자들은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게 되었고 모든 교회의 모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의 존립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보냈을 가능성이 있지만 바울의 초점은 예루살렘교회의 복음 전하는 거룩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만약 모든 성도들을 돕고자 했다면 하루에도 몇천 명씩 영접했다는 예루살렘교회는 어느 교회보다 많은 성도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많은 성도들에게 1년 양식을 공급해 준다는 것은 이제 막 세워진 작은 이방인 교회로서는 아무리 몇 개월에서 일년 가까이 모은다 해도 감당이 안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가뭄이 들면 최소한 두 해 동안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은 아무런 농토도 없고 직업도 없이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던 목회자들이었다. 이들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아 남아야 당시 선교의 중심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명령한 내용은 2절에 나온 내용이다. “매주 첫날”이란 말은 안식일 후 첫째 날이란 뜻이다. 유대인들은 토요일인 안식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안식일 다음 날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렸다. 따라서 이 말은 매주일 예배드릴 때마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특별헌금의 첫번째 원리는 “자신의 힘이 닿는 만큼” 이다. 오늘 본문에서 얼마씩을 따로 저축해 두라는 말은 원어에서 자신의 힘이 닿는 만큼이란 뜻이다. 적지만 정성과 힘을 다해 헌금을 매주 해서 계속 모아 두라는 말이다. 고린도후서 8:3에 보면 이러한 원리를 따라 헌금한 마케도니아 성도들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마케도니아 성도들은 그들의 힘이 닿는 대로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서 했다고 했다. 하지만 힘에 지나도록 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 은혜 받고 감사해서 힘에 지나도록 한 것이 아름다운 예라는 것이다.
가난한 성도들이 각사람이 매 주일마다 형편에 맞게 헌금하라는 것은 바울 당시 사회적 관습으로 보면 일상적인 일은 아니다. 당시 이런 경우에는 부자 성도 한 두 명이 거액을 내 놓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이고 일반적인 경우였다. 대부분의 가난한 성도들은 자신들도 먹고 살기 힘든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이 이처럼 각자가 자기 힘에 닿는대로 헌금을 모으도록 명령한 것은 계층간의 갈등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한 두 명의 부자 성도가 개인의 이름으로 거액의 헌금을 함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고 이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무시하게 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또 가난한 성도들도 헌금에 참여함으로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별헌금을 할 때 지켜야 하는 두번째 원리는 특별한 사람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약 큰 부자 한 두 명이 개인적으로 많은 돈을 기부할 때는 돈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상하 주종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지중해 연안에 있던 사회에서 일반적인 원칙이었다. 돈을 받은 사람은 돈을 준 개인의 가정교사처럼 말씀을 가르쳐 줘야 하고 존경을 해줘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또 돈을 준 사람 자신은 돈 받은 사람의 주인으로서 존경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사회의 일반적인 사회적 관습이다. 부자들이 비록 거액을 헌금했어도 그들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고 온 교우가 모아서 전달한 것이 되도록 한 것이다. 부자들은 어쩌면 조금 섭섭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가난한 성도들도 함께 기쁨으로 참여하게 해서 개인이 영광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한 것이다.
또 한가지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특별헌금의 원리는 즉흥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2절 끝부분에 보면 내가 갈 때에 그제야 헌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특별한 일을 위해 헌금할 때는 갑자기 많은 액수를 헌금해서 부담이 되게 하지 말 것이고 준비도 안된 채로 즉석에서 주머니를 부스럭부스럭 뒤져서 나오는 대로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