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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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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Word

고린도전서 14:1-3

방언 보다는 말씀으로 사람을 세워주는 예언을 바라라

땅에 심긴 씨앗과 자라난 밀 · 고린도전서 15장

2026. 7. 6. · 안정섭 목사 · 고린도전서 14장 강해 설교

고린도전서 14:1-3 사랑을 쫓아가며 신령한 것을 간절히 바라되 특별히 예언하기를 바라라. 방언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예언은 사람들을 세워주고 함께 걸으며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도록 목회적인 권고를 하는 것이다.

이전 말씀은 어릴 때 불완전하던 것들을 어른이 되어 다 버린 것처럼 지금은 거울로 보듯 희미한 것도 그 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분명히 볼 것이고 그러면 믿음 소망 사랑 세가지만 남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사랑을 추구하고 신령한 은사를 구하며 예언하기를 열망하라는 내용이다.

14장 전체를 한 단어로 요약하고 있는 핵심 구절은 14:20절이다. 20절은 영적으로 어린아이같이 굴지 말고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20절에 나온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의 비교는 앞의 2-3장에 나온 육신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의 비유에서 나온 어린아이와 어른과 완전히 똑 같은 단어이다. 14장 전체에서 바울은 아직도 육신에 속하여서 영적인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는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급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장성한 사람 즉 신령한 사람이 되라고 훈계하는 내용이다. 방언의 은사를 자랑하며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독점하며 신령한 사람인 것처럼 자신만을 자랑하는 어린아이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예언하며 교회를 세우는 어른들을 비교하고 있다.

14장 1절의 사랑을 추구하라는 말에서 추구하라 또는 구하라는 말로 번역된 말의 원어적 의미는 달려서 쫓아가라는 말이다. 이 말은 본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아가는 경우에 쓰는 말이다. 이 말이 쫓김을 당한다는 형태로 쓰이면 계속 쫓겨 다니며 핍박을 받는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 말은 사랑을 사냥하기 위해 계속해서 전력을 다해 달리면서 끈질기게 붙잡아서 내 것을 만들려고 노력하라는 뜻이다.

왜 사랑은 사냥감을 잡듯 쫓아가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그것은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사랑은 우리가 따라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따라서 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바울은 알았기에 평생 그것을 성취하려고 계속 달려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에게 조차도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랑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달렸다고 했다. 빌립보서 3:12절에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라고 했다. 역시 추격하여 따라간다는 뜻이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옥에 갇혔던 중에 쓰여진 서신이고 학자들은 보통 AD 61년 경에 로마 감옥에서 쓰여졌다고 본다. 따라서 빌립보서는 바울이 말년에 유언처럼 쓴 편지이다. 이것으로 보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까지 추격했는데도 완전히 잡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랑을 추격하라는 말은 우리도 바울처럼 그렇게 평생 동안 변함없이 온 힘 다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루려고 노력하라는 말이다.

사랑을 추격하라는 말과 함께 짝을 이루는 단어는 신령한 것을 열심히 구하라는 말이다. 신령한 것이란 영적인 은사를 뜻하기에 새번역은 신령한 은사로 번역한 것이다. 신령한 것이란 방언을 의미한다고 좁게 해석하는 사람들과 12:1절과 마찬가지로 전반적인 은사들을 말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신령한 것이란 일반적으로 영적 은사 전체를 의미하지만 14장의 문맥에서는 방언과 예언 같은 영적인 말을 하는 것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바울이 14:1절에서 예언을 강조한 이유는 고린도인들의 방언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며 신령한 은사란 방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보다 넓게 영적 은사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며 그 은사들 중에 예언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석한다. 예언과 방언 같은 신령한 말을 하는 은사만으로 제한하는 것을 비판하며 영적 은사 전체라고 말한다. 12:31절에서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고 14:1절은 영적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기에 바울은 14:1절에서도 은사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구하라 또는 사모하라로 번역된 말은 본래 끓어오른다는 말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이 감정적 정신적 영역으로 비유되면서 어떤 일에 뜨거운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 단어가 간절함을 열의를 재배한다는 뜻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NIV는 eagerly desire가 개인적인 욕망을 암시하는 것이기에 잘못 번역된 것이다. NRSV가 strive for 로 번역한 것도 잘못된 점은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기에 신학적으로 위험하다. 사랑은 내가 애를 써서 추격하여 잡을 수 있는 것이지만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받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키워갈 뿐이다.

1절 끝부분은 그러나 예언하기를 더욱더 열망하라고 했다. 이러한 말로 볼 때도 신령한 것이 방언만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다. 여러가지 은사들 중에 특별히 예언하기를 더욱 더 갈망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방언과 예언을 하나로 묶은 것은 예언이 성령에 감동되어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3절을 보면 예언은 권면하고 덕을 세우고 위로를 한다고 했기에 이는 목회적 권고를 뜻하는 것이다. 구약을 보아도 예언이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것이고 돌아오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이지 미래 일을 말하는 신비한 말들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신령한 은사를 가진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실탄이 장전된 권총이나 날이 시퍼렇게 선 회칼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다. 사랑이 없이 은사만 가진 성도는 자신을 다치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듯 하여 다른 성도들의 마음까지도 아프게 하고 실족해서 넘어지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은사를 달라고 하나님께 떼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잡으려고 애를 쓰면서 그 다음에 갖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여러가지 영적 은사들 중에 먼저 예언하길 바라라는 것이다.

2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왜 모든 신비한 은사들 중에 예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열망을 해야 하는지 설명하려는 것이다. 왜 예언을 특히 더 열망해야 하는가 하면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께 말한다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어서 왜냐하면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방언이란 본래 혀라는 뜻이고 비유적으로는 인간의 언어를 뜻한다며 황홀경적 발화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 경우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 일부가 하는 언어는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기에 하나님께 말한다고 한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께 말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9절에서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도 초점은 방언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는 것에 있지 않고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에 있다.

2절에서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라고 한 것과 대조되는 것이 3절에 나오는 그러나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언이 무엇인가 정확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언의 목적이 3절에 세가지로 정확히 나와 있다. 첫째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고 둘째는 권면하는 것이라고 했고 셋째로는 안위하는 것이라고 했다.

첫번째 덕을 세운다는 말은 본래 집을 짓는다는 뜻이다. 이는 개인의 신앙을 말씀으로 굳게 세운다는 뜻이거나 교회 공동체를 굳세게 만든다는 뜻으로 쓴다. 같은 말이 4절과 17절에도 나와 있다. 8장 1절에서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나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했다. 10장 23절에도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라고 했다. 따라서 덕을 세운다는 말은 성도들의 믿음을 굳세게 하여 교회가 반석 위에 선 것처럼 굳게 서게 한다는 뜻이다.

두번째 목적은 권면하는 것이다. 원어의 의미는 곁에 부른다는 뜻이다. 세워주는 것이 홀로 굳게 설 수 있도록 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부르며 다가가서 괜찮다고 하며 손을 잡고 함께 걷자고 하는 그림이다. 권면이라는 말은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침을 주듯 하는 것을 말한다. 4장 16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하고 있다. 권면이란 말은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 같이 다른 성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자녀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세번째 목적은 안위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곁에 와서 속삭이며 이야기를 해 준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곁에 와서 속삭이며 달래는 위로라는 뜻이다. 이도 역시 부모가 자녀에게 위로하듯 성도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거나 친구와 싸운 뒤 울며 집으로 돌아 갔을 때 안아 주시며 등을 토닥이시던 엄마의 손길 같은 것이다. 이 세 단어가 담고 있는 본래 그림을 보면 먼저 홀로 튼튼하게 설 수 있도록 세워준 뒤 함께 걷다가 넘어졌을 때 다정하게 속삭이며 일어나 다시 걸 수 있도록 위로하는 장면이다.

19절에 보면 예언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단서가 있다. 19절은 다섯마디의 예언과 일만 마디의 방언이 대조가 된다. 다섯 마디란 짧은 한 문장을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예언이란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믿음을 굳게 하고 부모처럼 권면하며 함께 신앙의 길을 걷자고 하는 것이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세워주고 위로하는 목회적 권고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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