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9-11 너희가 행사하는 권리가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지 잘 살펴보라. 지식이 있는 너희가 우상의 신전에서 먹는 것을 보면 약한 사람들이 담력을 얻어서 먹게 되고 결국 망하게 되는데 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이전 말씀에서 바울은 그러나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음으로 양심이 더럽혀지는 것이라 하자 고린도 교회의 지식인들은 음식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너희 자유 때문에 약한 사람들이 넘어진다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구하신 자들이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이들의 주장에 대해 바울사도는 9절에서 분명히 경고한다. 개역은 9절 첫부분을 "그런즉"으로 번역했지만 원어를 보면 "그러나"로 번역되어야 한다. 8절에서 고린도 교회 지식인들이 말한 음식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다는 말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라는 것이다. 조심하라는 말은 잘 살펴보라는 뜻이다. 너희의 이 자유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자유라는 말은 다수의 영어 번역들에서도 freedom이나 liberty로 번역했지만 원어는 권리라는 뜻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본인이 선택하고 행동할 권리라는 뜻이기에 자유로 번역한 것이다. 만약 자유라고 한다면 그 권리를 행사하는 모습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원어의 본래 의미는 분명히 정당한 권한이나 권리라는 뜻이다. 9절에서는 문맥에 따라 자유로 의미를 살려 번역한 것뿐이다. 바울의 이러한 말은 바울도 적법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권한의 행사는 고린도 교인들이 간과해온 여러 요인들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며 많은 학자들은 우상의 음식을 먹을 권리로 이해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당시 사회의 최상류층 지식인들의 권리 행사이다. 그러한 권리를 행하는 것이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을 놓은 것이 아닌지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걸림돌이라는 말은 로마서에서 네 번이 나온다. 특별히 로마서 9:23절을 보면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말은 달리기 경주를 하다가 걸려 넘어져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선수들끼리 달리는 경기에서 한번 걸려 넘어지면 대부분 다시는 따라잡을 수 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4-27절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달리기로 비유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8:9절에서 걸림돌을 놓지 않도록 하라는 말도 앞서 달린 자들이 걸림돌을 놓아서 뒤에서 달리며 따라오는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그림으로 이해할 수 있다.
10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어서 "만약 누군가 지식이 있는 너희가 우상의 신당에 누워있는 것을 본다면" 이라는 조건으로 시작한다. 지식을 갖고 있다는 말은 당시 사회의 귀족층을 나타내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도 모르고 지식도 없었고 오직 최상류층 귀족들만이 교육을 받고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을 갖고 있는 귀족층의 반대말은 이어 나오는 약한 사람들이다. 약한 사람들도 그 양심에 용기가 생겨 우상의 제물을 먹게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용기가 생겨" 또는 "담력을 얻어" 라고 번역된 말은 원어에서는 건물을 튼튼히 세운다는 단어에서 온 말이다. 지식도 믿음도 없는 약한 자들도 그 양심이 강하게 세워진다는 것이다. 저렇게 지식이 있고 교회의 지도자인 사람들도 먹는데 나도 못 먹일 이유가 어디 있느냐며 먹는다는 것이다.
이들 지식인 귀족들은 이방신전의 식당의 특별석에 마련된 소파에 기대어 누워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10절의 “앉아”라는 말은 원문에서는 “기대어 누워”라는 뜻이다. 이 말과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이 말이 호화스러운 파티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전 식당의 귀빈실에서 몇 사람이 호화스러운 소파에 기대어 누워 있다. 이들은 고린도의 유력한 사람들이고 귀족들이다. 이들은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 채 여장을 한 십대의 소년들이 날라다 주는 고기와 술을 즐겼다. 이들은 일차로 고기를 실컷 먹었다. 이제 이차 파티인 술을 가져다주길 기다리고 있다.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십대 소년들이 여장을 한 채 술시중을 들고 있다. 여자는 남자들의 파티에 참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들이 당시 사회의 가장 존귀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들이 우상의 신전 식당에서 기대어 누워 음식을 먹는 것은 당시 상류층 사람들의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것과 같다. 이들이 이방 신전에 가지 않는 것은 마치 오늘날 미시시피 주지사가 특별한 귀빈들만 초청하는 만찬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들은 귀족사회에서 왕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이 이 세상의 신은 하나님 한 분뿐이고 다른 모든 신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 드린 제물도 다른 음식과 똑 같은 음식들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가난한 형제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신전의 귀빈실에서 열리는 사교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자신들의 지식을 통해 합리화하는 것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무지하고 가난한 하층민 출신 성도들 때문에 포기하기 싫어서 이런 변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11절에 나온다. 11절은 원어에서 왜냐하면으로 시작한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이라는 뜻이다. 그 약한 사람들이 너의 그 알량한 지식 안에서 멸망한다는 것이다. 멸망한다는 말은 10절에서 용기를 얻었다는 말의 반대말로 건축물이 무너지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10절에서는 양심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용기를 갖도록 튼튼하게 세워졌는데 이제 그들은 믿음으로는 완전히 무너진다는 뜻이다.
이는 바울이 약한 성도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고 애가 타는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 있고 신앙적으로도 분명히 알고 있는 고린도 교회 상류층들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에 우상의 신전에서 먹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이 없는 약한 사람들인 하층민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을 두려워하고 우상의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들 때문에 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나서 진짜로 다시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고 멸망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우상에게 드린 제물은 다른 음식과 다를 바 없는 음식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그 지식 때문에 약한 자가 멸망하는데 그 형제들은 바로 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약한 자들을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도록 하셨는데 지식이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으로 그들을 무너뜨린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세운 자들을 무너뜨린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