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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새벽말씀 › 이사야 › 66:7-14

Dawn Word

이사야 66:7-14

영광과 평화와 위로가 공동체 안에 넘치게 하셔서 튼튼하게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2019. 1. 29. · 안정섭 목사 · 이사야 66장 강해 설교

이사야 66:7-14 하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게 하시고 양육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와 위로가 그 공동체 안에 넘치게 축복하신다.

하: 위로하시는 하나님

나: 하나님의 영광과 평화가 우리 교회에 흘러 넘치게 되어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튼튼하게 성장하길 기도한다.

이전 말씀은 거짓으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곡소리 나도록 두들겨 패실 것이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실 것이라고 했다. 오늘 말씀은 이제 예루살렘을 산모로 비유하며 자녀를 낳아 함께 기뻐하는 모습으로 이어간다. 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메세지이다.

7절은 짝을 이루는 댓구로 되어있다.

앞의 구절은 “시온은 진통이 오기도 전에 해산한다” 라고 했다. 원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몸을 비틀기도 전에 그녀는 아이를 낳는다” 라는 뜻이다. 이와 짝을 이루는 뒤의 구절은 “해산의 고통이 오기도 전에 아이를 낳는다” 이다. 원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고통이 찾아오기도 전에 수컷이 탈출하게 만들었다”

라는 뜻이다. 6절에서는 여인으로 비유된 시온의 성전을 하나님께서 두들겨 패는 모습이 나왔다. 이제 새롭게 된 새 예루살렘의 성전인 시온이 아이를 출산하는 모습이다.

진통과 고통이 서로 비교된다. 진통이란 본래 춤을 춘다는 뜻이다.

본격적인 해산의 고통이 시작되기 전에 몸을 비틀기 시작하는 때이다. 그런데 그 전에 해산한다는 것이다. 해산의 고통은 아이를 낳을 때 산모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그 전에 사내아이가 탈출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산모는 몸을 비틀기도 전에 본격적인 고통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이가 그냥 “슝!” 하고 탈출하게 한다는 뜻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고통은 없다는 뜻이다. 이는 창세기 3:16절에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을 준것과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주범인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해산의 고통을 주셨던 것이다. 물론 본문은 실제 여인이 아이를 낳는 이야기가 아니다.

새 예루살렘은 아무런 고통도 없이 믿음의 자녀들을 낳게 된다는 비유이다.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는 이제 타락한 인간들의 모임이 아니라 처음 창조 때 지음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8절은 두개의 짝을 이루는 댓구로 묻는 질문과 그에 대한 한마디의 대답으로 되어있다. 먼저 “누가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느냐?” 와 “누가 이런 일을 본 적이 있느냐?”

가 짝을 이룬다. 신기한 일이 이미 있던 일이라면 누군가 들은 사람이 있고 직접 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아무도 전에 어디에서도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이라는 뜻이다.

다음의 두개의 짝은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길 수 있으며”

와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이다. 나라 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땅이라는 뜻이고 이와 대조되는 말은 그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새 땅이 하루만에 생겨날 수 있느냐? 그 땅의 사람들이 하루만에 태어날 수 있느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시온은 진통이 오자마자 아이들을 낳았다” 라는 것이다. 원어를 보면 시온은 몸을 비틀자마자 아이들을 낳았다는 뜻이다. 앞에서 진통이 오기 전에 낳았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진통이 오자마자 낳은 것이 아니다.

그냥 몸 한번 비틀으니 아이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갑자기 임한다는 비유이다.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갑자기 탄생한 것을 말한 것일 수 있다. 이는 또한 주님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갑자기 나타난다는 것을 나타낸 비유일 수 있다.

9절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두개의 질문이 역시 같은 구조로 나란히 배치된다. 먼저 “바로 내가 아이를 모태에 나오게 하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낳게 할 수 없겠느냐?” 라는 질문이다. 원어는 “내가 만약 터져 나오게 한다면 내가 어찌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겠느냐?”

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양수가 터져 나오게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순간에 낳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했다.

똑같은 구조로 “아이를 낳게 하는 이가 나이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못나오게 막겠느냐?” 라고 했다. 이는 “내가 아이를 낳게 하는데 내가 틀어 막겠느냐?” 라는 뜻이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한다. 앞에서는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하고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한 것이다. 둘 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뜻이다.

이사야 26:18절에서는 “우리가 잉태하고 고통하였을찌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생산치 못하였나이다” 라고 했다. 전에 시온은 잉태하고 진통을 겪었는데 낳은 것은 바람이었고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37:3절에서는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라고 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갑자기 나타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갑자기 큰 교회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갑자기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는 것이다.

10절도 역시 짝을 이루는 댓구로 되어있다. 먼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리쳐 부르며 새롭게 태어난 새예루살렘과 함께 기뻐하라는 것이다. 또 이와 짝을 이루는 댓구는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슬퍼하던 사람들아 너희는 모두 그 성읍과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 라고 했다.

자녀를 낳지도 못하고 죽은 산모같던 예루살렘에 대해 울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던 남은 자들이다. 이들은 새 예루살렘과 함께 최고로 기뻐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곧 슬피 우는 사람인 것이다. 아들이 망한 것을 보고 슬피 울 사람은 아들을 사랑하는 어미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곧 우는 사람이다. 이제 그 울음이 큰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11절은 이제 낳은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어미의 그림으로 바뀐다. “이는 너희로 하여금 위로를 주는 예루살렘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게 하고 또 너희로 하여금 풍요한 젖을 빨아들여 기쁨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라고 했다. 이사야 당시 예루살렘은 품에 안고 있는 아기가 어미의 품에서 굶어죽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이사야가 예언하는 새 예루살렘의 품에 안긴 믿음의 자녀들은 젖을 배부르게 먹는다는 것이다. 풍요의 젖이란 영광의 풍부함이란 뜻이다. 굶주린 어미에게서 아무 젖도 나오지 않아 굶어 죽어가던 이사야 당시의 모습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이다. 기쁨을 누리게 한다는 말은 젖이 넘치고도 넘쳐서 깊이 들이마신다는 뜻이다. 이제 아이는 뱃속 깊은 곳까지 젖이 가득 차고 그것이 넘쳐서 코로 삐져나올만큼 먹고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이다.

12절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라는 말로 시작한 뒤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하며” 라는 말로 이어간다. 평화를 강물처럼 펼친다는 뜻이다. 강물이란 와디에 갑자기 물이 채워지는 모습이다. 평화가 와디의 강물이 갑자기 가득 채워지듯 그렇게 채워진다는 뜻이다. 이는 11절의 젖을 빨아 배부르게 한다는 말과 연결되는 말이다.

또 이어서 “뭇나라의 부귀영화가 시냇물처럼 넘쳐서 흘러오게 하겠다” 라고 했다. 원어는 나라들의 영광이 넘쳐흐르는 냇물처럼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영광을 부귀영화라고 의역한 것은 11절의 영광의 풍부함이라는 말과 연결고리를 끊어 버린다. 수많은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몰려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지 단순히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많은 나라들에서 재물이 들어오는 그림이 아니다. 11절의 풍부한 예루살렘의 젖이 이젠 강물처럼 갑자기 채워지고 흘러 넘치는 시내처럼 차고 넘치는 것이다. 그 넘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11절의 젖과 12절의 강물과 시냇물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 12절 끝부분을 통해 증명이 된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젖을 빨며 그 팔에 안기고 그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오는 동작은 세가지이다. 먼저 젖을 빠는 동작이 나온다. 이어서 “그 팔에 안기고” 라는 말은 “엉덩이 위에 얹혀 운반되며” 라는 뜻이다.

이는 아이를 엉덩이 위에 걸쳐 업는 모습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무플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 이라는 말은 무릎 위에서 기뻐한다는 뜻이다. 이는 엄마가 아기를 무릎위에 세우고 어르며 기뻐하는 모습이다.

13절에는 위로 라는 말이 세번이나 반복되며 위로를 받을 것이 강조되고 있다. “어머니가 그 자식을 위로하듯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이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라고 했다. 예루살렘이 어미처럼 믿는 자들을 먹이고 위로할 것인데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위로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제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인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공동체이다.

14절은 먼저 “너희가 이것을 보고” 라고 했다. 먼저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통해 남은 자들을 위로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마음이 기쁠 것이며” 라고 했다. 또 “너희 뼈들이 무성한 풀처럼 튼튼히 자랄 것이다” 라고 했다. 마음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심장이다. 뼈는 그 심장을 감싸고 있는 속사람이다.

마음과 뼈가 함께 속사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속사람이 비가 적당히 내리는 계절에 무성하게 자라는 풀처럼 그렇게 자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손들이 그 종들에게 알려지며”

라고 했다. 주님의 손을 권능이라고 번역했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종들에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손들은 대적들에게 진노하시는 손들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손길이지만 대적들에게는 진노의 손길인 것이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예배 공동체인 새로운 시온을 통해 자녀들을 낳고 그 믿음의 공동체인 새 예루살렘을 통해 양육되며 그 속사람이 튼튼하고 무성하게 자라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갑자기 생겨났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갑자기 임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교회를 통해 믿음의 자녀들이 양육된다. 그러나 목사 혼자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전체 안에서 양육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오늘 말씀처럼 넘쳐흐르는 젖을 먹고 건강하게 자라서 그 속사람의 뼈가 튼튼하게 자라길 소망한다. 하나님의 크신 영광과 위로와 평화가 우리 교회에 흘러 넘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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