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4:17-19 바울은 자신을 닮게 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그대로 닮은 아들인 디모데를 보낸다며 디모데가 바울의 길을 생각나게 하도록 가르칠 것이고 교만한 자들은 바울이 가면 그들의 말이 아닌 능력을 보고 그들의 교만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이다.
이전 말씀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같이 훈계하려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는 무수한 인도자들이 있지만 나는 진짜 너희를 낳은 아비이니 나를 흉내내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바울 자신을 그대로 닮은 디모데를 보내면 디모데가 바울의 길을 생각나게 할 것인데 그런데도 교만한 태도를 보이는 자들은 바울이 가서 말이 아닌 그들의 능력을 보겠다고 말하는 내용이다.
17절은 원어에서도 이 일 때문에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도록 하는 일 때문에 라는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본 받는 자들이 되도록 하는 것이 교회가 하나되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이 일 때문에 바울은 위해서 바울은 디모데를 보냈다고 말한다. 바울을 흉내내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일을 위해서 디모데를 보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한국어에서 흔히 쓰는 표현으로 쓴다면 디모데는 영적 아버지인 바울을 그대로 빼다 박은 사람이다.
하지만 15절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도 바울 자신이 낳은 자녀들이라고 했다. 고린도 성도들 역시 바울이 진정한 사랑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과 디모데는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이어서 밝힌다. 이어지는 디모데를 설명한 절에 보면 사랑하는 아들이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했다. 디모데에게 덧붙여진 설명은 신실한 아들이고 디모데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는 다른 점이 신실하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이 부분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도 사랑받는 자녀이지만 디모데와 동일하게 신실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디모데는 고린도 성도들과 같이 바울의 사랑하는 아들인 것과 같이 디모데는 바울과 같이 주인에서 신실한 자라고 설명한다. 결국 디모데는 바울을 충실하게 닮았고 고린도 성도들은 닮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디모데와 고린도 교인들의 차이로 설명하고 어떤 이는 고린도 교인들과 디모데는 둘 다 아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디모데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닮은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원어 그대로 본다면 "사랑하는 아들이고 신실한" 이라고 되어있다. 두번째에는 아들이라는 말을 생략한 것이다. 그 다음에 주 안에서 라는 말이 나온다. 원어의 문법적인 구조로 본다면 주 안에서 라는 말은 주 안에서 사랑하는 아들이고 주 안에서 신실한 아들이라는 뜻이다. 개역과 새번역과 대다수의 영어 번역들은 그렇게 주 안에서가 둘 다 꾸미는 것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NIV는 사랑하는 아들 다음에 쉼표를 찍어서 주 안에서 라는 말이 신실한 아들이라는 말만 꾸미는 것으로 번역했다.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은 주안에서 신실하지 않은 아들인데 반해 디모데는 주안에서 신실한 아들이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문법적으로는 디모데가 주 안에서 사랑하는 아들이고 신실한 아들이지만 강조점은 분명히 디모데가 신실하다는 점에 있다.
이어지는 절은 디모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의 길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는 말이다. 길이란 구약에서도 주로 하나님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에 지식이 아닌 몸에 배어 있는 생활 방식을 뜻하는 말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바른 길인 것으로 표현하지만 바울은 그 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 삶의 길을 따라가고 있고 디모데는 바울이 따라가고 있는 그 길을 충실하게 그대로 잘 보여줄 것이라는 뜻이다.
17절 끝부분은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안에서 내가 가르친 것처럼"이라는 말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만 그렇게 가르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 안에서 다 그렇게 가르쳤다는 뜻이다. 무엇을 그렇게 가르쳤는가? 그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것처럼 바울을 닮으라는 것이다. 특별히 앞부분에서 바울이 강조한 바울의 길은 바로 십자가와 그리스도안에서 경험하는 모든 고난들이다. 디모데도 역시 바울처럼 고난 중에도 겸손히 섬기는 본을 보일 것이기에 바울의 생활방식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나게”로 번역된 말은 고린도전서 11:24절에서는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라에서 기념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떡은 예수님의 찢기신 살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따라서 주님의 만찬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고 되살리기 위함이다. 4:17절도 역시 바울이 가르친 것을 낱낱이 거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인데 바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던 것을 디모데가 가서 말씀을 전함으로 바울의 그 가르침을 다시 기억나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바울을 충실하게 닮은 디모데를 보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은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몸에 배어있는 생활방식으로 가르친 것이다. 디모데도 역시 바울처럼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간 바울의 길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각처의 교회에서 바울이 똑같이 가르치기도 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은 당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통적인 가르침이고 기독교 복음의 가장 핵심이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지도자들은 바울이 처음 그러한 복음을 전했을 때 감격하고 변화를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고 나서 그러한 원초적인 복음은 점차 잊혀져 가고 당시 세상의 윤리와 사회질서, 철학등이 교회에 들어와서 이들은 점차 세속화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분쟁이 생겼고 이에 대해 바울은 전에 전했던 십자가의 복음에 감격했던 당시의 기억을 디모데가 다시 되살리게 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18절은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어떤 이들은 이제 바울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교회에서 으뜸가는 지도자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해 졌다는 것이다. 교만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바람에 의해 잔뜩 부풀려진 것 같은 상태를 그림처럼 표현한 말이다. 우리말로 한다면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잘난체하며 버티고 있는” 것 같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상태를 묘사한 4:9-13절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낮아지되 가장 낮아져서 노예만도 못한 벌거벗겨지고 묶인채로 질질 끌려다니는 사형수 같은 존재로 지내고 있는 그림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인 것이다.
19절도 역시 그러나 라는 말로 앞 문장과 연결한다. 바울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며 이젠 자신들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잔뜩 교만해져 있으나 란 뜻이다. 바울은 "내가 속히 갈 것이다, 만약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라고 말한다. 허락하신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원하신다면” 이란 말을 의역한 것이다. 주께서 원하신다면 즉시 가서 교만한자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확인해 볼 것이라는 것이다.
교만한 자들의 말은 바람에 잔뜩 부풀려진 광고용 풍선인형 같은 것처럼 크게 부풀려진 것이다. 이는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않고 말로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의 수사법과 웅변술로 잘 훈련된 연설가들이고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었을 것이다. 능력이란 말은 풍선처럼 바람으로 부풀려진 것과는 반대로 실제로 구체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말이다. 바울이 가서 확인해보면 그들이 세상적인 지위와 그리스의 수사법과 철학으로 교육받은 말 때문에 받고 있는 헛바람만 빠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구체적으로 행함에 의해 받는 존경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은 기적적인 능력이나 눈속임 같은 마술이란 뜻이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말로만 지껄이느냐 아니면 실제로 삶으로 행하느냐를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