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3:1-3 나는 너희들에게 육에 속한 사람 곧 젖먹이에게 말하듯 가르쳤고 어른 음식을 감당할 수 없기에 어른 음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 너희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어른 음식을 감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도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 아닌 인간의 지혜를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전 말씀에서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는가? 아무도 그럴 사람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너희를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젖먹이를 대하듯 말했다며 아직도 젖먹이처럼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내용이다.
원어에서 1절은 "그리고 나는"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본래 그리스어에서는 동사 자체에 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기에 주어는 따로 사용하지 않는다. 더구나 맨 앞에 그리고와 함께 쓴 것은 특별한 강조의 의미로 말한 것이다. 이는 그동안 계속 우리라고 말하다가 이제 분명히 바울 자신만의 견해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어지는 책망은 바울 자신이 홀로 하는 것임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라고 부르는 것은 이어지는 책망을 다소 부드럽게 해준다.
말할 수 없다는 말은 원어에서 수동태이기에 바울이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고린도 성도들이 육에 속한 사람이고 젖먹이 같기에 영적인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육에 속한 아이인데 그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와 같은 것이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개역이나 새번역에서 어린아이라는 말은 어른 음식을 먹지 못하는 젖먹이라는 뜻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된 사람이지만 아직도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자랑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처음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젖먹이 상태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젖먹이로 머물며 자라지 않는다면 큰 문제인 것이다.
이어서 2절을 보면 고린도 성도들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젖먹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젖으로 먹였고 음식을 먹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음식이라는 말은 젖과 반대가 되는 말이다. 아기가 먹는 젖과 조금 더 자라서 젖을 뗀 어린아이에서 어른까지 모두가 다 먹는 것이 음식인 것이다.
원어에서는 이어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어가면서 너희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른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뜻인데 미완료 과거이기에 과거에 계속해서 어른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른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뜻이 될 수 있는 것이 미완료 과거이다. 이어서 "그러나" 라는 말로 지금도 아직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할 수 없다는 말은 현재형이기에 고린도 성도들은 아직도 젖만 먹는 젖먹이 아기이다.
아마도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너무 초보적이고 다 아는 것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은 수준 높은 지식인들인데 바울이 가르치는 언어는 너무 수준이 낮고 저속한 서민들 수준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울이 가르치는 내용들이 자신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기독교의 초보적인 교리였기 때문에 우리가 젖먹이 아기인 줄 아느냐고 반박했을 가능성도 있다.
전통적인 해석은 젖은 초보적인 기독교 교리를 뜻하고 단단한 음식은 더 깊고 복잡한 신학적 교리로 보고 가르침의 수준 차이를 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바울이 지금 현재도 어른 음식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이어지는 권고들은 초신자들에게만 가르치는 기본적인 교리가 아니다. 아비의 첩을 상속받은 사람을 책망하는 내용도 나오고 결혼과 독신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우상에 바쳤던 제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도 나온다. 그 내용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도 심각한 수준의 논쟁이 있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심도 깊은 설명을 한 것이 고린도전서의 내용들이다. 그렇다면 이는 초보적 교리와 수준 높은 교리의 가르침을 비유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젖먹이로 멈춰있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는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두가지 대조는 초보적 교리와 더 발전된 교리의 차이가 아니라 복음의 참된 양식과 고린도 성도들이 더 선호해온 자신들이 합성해서 만든 대체물 사이의 대조라고 말하며 고린도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식단의 변화가 아니라 관점의 변화이다. 따라서 문제는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도 젖먹이 상태에 있고 전혀 자라나지 않고 있으니 관점을 바꾸라는 뜻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복음을 자신들이 갖고 있는 세상적인 지식과 섞어서 자신들이 합성한 다른 종류의 기독교를 믿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기복신앙과 섞어 놓았고 미국 기독교는 자신들의 번영과 섞어놓은 것과 마찬가지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3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설명하며 너희가 아직도 현재 육신에 속한 사람의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또 다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어가며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것이다. 시기는 마음 속에 있는 상태이고 분쟁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상태이다. 성숙한 어른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서로 용납하고 인내하며 사랑해야 하는데 그 반대로 어린아이들처럼 시기하고 다투고 있다는 것이 몇 년 동안 자라지 않은 아주 기괴한 젖먹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너희가 현재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이고 사람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행한다거나 살고 있다고 번역한 말은 원어에서는 걸어간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걷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걷지 않고 사람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따라 걷는다는 말은 당시 그리스-로마세계의 지식과 윤리와 철학을 따라 행한다는 뜻이다. 고린도 성도들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들의 생각을 합성해서 만든 합성섬유로 된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