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2-23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그것은 유대 사람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이다.
이전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폐하시고 말 잘하는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유대교 율법학자들이나 둘 다 갖추고 토론을 잘하는 사람들이나 다 바보로 만드시고 어리석게 들리는 선포를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하는 내용이다.
22-23절은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바울 당시 이 세상이 추구하고 있는 일과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내용이다. 한글 성경이나 대부분의 영어성경들까지도 “지금까지도” 와 “역시”라는 연결하는 말들을 생략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어 원문에는 22절 첫 부분에 이 두 단어가 나와 있다. 이 두 단어들은 바로 앞의 21절과 긴밀하게 연결하는 구실을 한다. 즉 이미 예언이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너무 답답하다는 것이다.
아직도 알지 못하는 증거로 21절에서 이 세상으로 표현한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들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기적적인 증거를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있고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메시야라는 분명한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사람들은 궁극적인 지혜, 즉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기에 계속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속한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있기에 그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속한 또 다른 사람들인 그리스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지혜 조차도 모르기에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 헤메이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유대인들이 조금 더 나은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둘 다 똑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이미 십자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주어졌는데도 이 세상의 어리석음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니 너무 답답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사람들의 현재 상태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22절에서 25절까지 계속되는 현재형 동사들은 아직도 계속 현재형으로 진행중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십자가를 통해 이미 성취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 채 세상적인 지식들과 알지 못하는 신들을 찾아 헤메이며 방황하고 있다. 우리의 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세상사람들의 상태를 알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현재 영적인 상태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없다.
한글 성경들은 23절 시작하는 부분의 “하지만” 이란 말을 빼 놓고 대신에 22절 끝부분을 "찾으나" 라고 번역했다. 다수의 영어 번역들은 분명히 "But" 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런 연결하는 말들을 놓친다면 원문의 의도를 놓치기 쉽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 십자가로 하나가 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아닌 새로운 신분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신분인 바울 일행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분명히 알기에 증거를 보여달라고도 하지 않고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 즉 바울 일행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는 고린도 교회도 모두가 하나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직역하면 걸림돌이고 의역하면 모욕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란 다윗 같은 강력한 군사적인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주변나라를 정복하여 다윗왕국 같은 시절을 회복하는 자라고 해석해왔다. 다윗 왕 같은 영웅이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할 것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에게 로마제국 군대에 잡혀 반역죄로 처형당한 자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라는 것은 발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나 엄청난 모욕이 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지혜를 추구하는 이방인들에게도 아주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다.
이 단어가 나타내는 그림을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인 덫(deadtrap) 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어원을 근거로 그 덫일 가능성을 설명하면서도 성경 밖의 그리스어에서는 덫이라는 의미는 잘 입증되지 않는다며 걸림돌보다는 노골적이고 공개적인 모욕을 의미하는 "affront"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서 9:33절과 베드로전서 2:8절에서는 같은 단어에 바위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다. 예수께서도 누가복음 20:17절에서 시편 118:22절을 인용하시며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신 것에 근거해서 바울과 베드로가 걸려 넘어지는 반석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걸림돌로 번역된 단어는 덫의 그림보다는 걸림돌의 그림이다. 이것을 공개적인 모욕으로 번역한다면 이 단어가 보여주는 그림언어가 사라진다. 누가복음 20:17절에 나온 것처럼 질그릇이 돌에 걸려 넘어져 박살나는 그림이고 커다란 머릿돌이 도자기 위에 떨어져 가루가 되는 그림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완전히 멸망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