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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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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Word

고린도전서 1:18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땅에 심긴 씨앗과 자라난 밀 · 고린도전서 15장

2026. 2. 19. · 안정섭 목사 · 고린도전서 1장 강해 설교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말씀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전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침례를 주라는 것이 아니고 세상적인 연설 기술이 아닌 순수한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셨는데 이는 십자가를 무효화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십자가의 말씀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18절은 원어에서 또 다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 복음을 전하게 하신 목적인가 하면이라는 뜻이다. 원어에서 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그 말씀 십자가의"라는 말이다. 개역은 NEB와 같이 교리(doctrine)라는 뜻으로 보고 그 의미를 살려 "십자가의 도"라고 번역한 것이다. KJV는 "그 말씀"을 설교라는 말로 의역을 했다. "그 말씀"을 설교로만 한정한 것이다. NIV나 NLT는 메시지로 의역을 했다. 하지만 다수의 영어 번역들은 새번역처럼 "십자가의 말씀" 이라고 원어 그대로 직역헸다.

"그 말씀" 이라는 말이 16절의 인간의 지혜의 말 이라는 말과 대조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사도적 설교의 전달방식과 전달내용을 포함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설교라고 번역하면 내용은 잃어버리고 그 활동에만 초점을 만춘 것이 되고 교리로 번역하면 그 활동은 잃어버리고 내용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되기 때문에 그 활동과 그 내용 둘 다를 포함할 수 있는 말씀이나 메시지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말씀 사건 전체를 염두에 두고 좀 더 광범위한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 말은 복음 이외의 것을 의미할 수 없다고 말하며 십자가를 내용으로 하는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기서 핵심은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말이 지닌 선포적 성격도 있지만 핵심은 십자가의 내용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선포의 내용의 핵심을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달아 죽인 예수가 바로 너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말씀이란 그 내용인 교리와 선포한 전달 방식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는 이어지는 멸망 받을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가 구원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리스도 라는 말이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문맥을 따라 해석한다면 십자가의 말씀이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메시지가 왜 미련하게 보이는가? 먼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란 다윗과 같은 전쟁 영웅인 왕이었다. 하나님 말씀을 이기적으로 해석해서 그리스도는 주변 나라를 정복하고 자신들을 잘살게 해줄 왕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가 바로 그 왕이라는 주장은 어리석은 말처럼 보이는 것이다.

또 당시 그리스 로마 세계 사람들의 사회질서 체계에 따른다면 재산이 많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주인으로 삼고 존경을 했다. 그러면 그 주인은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고 자신이 가진 군사력으로 따르던 사람들을 보호해 주었다. 따르던 사람들은 주인에게 존경과 충성을 바침으로 서로의 관계가 유지되었다. 이것이 당시 사회질서였다.

오늘날 미국으로 말하면 주지사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주인으로 삼고 자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한 죄수인 예수가 자신들의 주인이라고 하니까 세상 사람들에겐 정말 미련하게 보이던 것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받은 사람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인 삼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지켜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분파 간의 갈등은 사람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쉽게 없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기적적인 능력을 진정으로 체험하고 나면 십자가의 능력을 온 힘을 다해 전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그 능력에 사로잡혀 부끄러운 십자가를 담대히 전할 때 기적을 달라고 하는 게바파와 그리스도파나 지혜를 추구하는 바울파나 아볼로파 까지 다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기적적인 능력을 체험할 때 그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담대히 전하는 일에 모두가 온 힘을 쏟다 보니 혈통이나 사회적 신분 등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신분의 벽도 허물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두 종류의 갈등 중에서 더 심각했던 갈등은 사회 계층 간의 갈등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지혜라는 단어로 알 수 있다. 지혜라는 말은 고린도전서에서만 17번 나오는데 그 중 16번은 1장에서 3장 사이에 나옵니다. 바울이 언급한 지혜란 그리스 철학이라는 내용 자체와 수사학적 웅변술이라는 전달형식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는 로마 제국 안에서 특별한 지배계층만이 소유할 수 있던 것이었다.

이 특권층들은 소수였겠지만 자신들이 배운 그리스의 수사학적 웅변술로 교회 안에서도 존경 받는 자리에 서려고 했을 것이고 낮은 신분의 대다수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의 철학과 수사학적 웅변술 자체를 반대했던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십자가의 능력이 담기지 않은 모든 형태의 말들에 반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들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서 교만하게 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이러한 지식을 가진 것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세상적인 지혜로 교만하게 되어 십자가의 메시지를 가리는 것을 반대했던 것이다. 바울 역시 모든 철학과 수사학적 웅변술에 능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가진 이러한 것들을 모두 내려 놓았다. 억지로 내려 놓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고 나니 배설물처럼 여겨져서 내려놓은 것이다.

빌3:8에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을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고 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자신의 능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계시에서 온 것이었다. 바울 자신도 자신이 전에 자랑했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겨 다 내려 놓았으니 너희도 세상적인 자랑들을 다 내려 놓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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