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6:22 주안에서 이 편지를 쓰는 나 더디오가 여러분에게 문안한다.
이전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 디모데와 자신의 동족들인 루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를 로마교회 사람들에게 앞으로 가까이할 사람들로 추천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바울의 편지를 대신 써준 더디오가 직접 인사하는 내용이다.
두번째로 주목할 사람은 함께 말씀을 기록하던 Tertius이다. 이 사람은 바울의 편지를 받아쓰던 사람이었다. 받아 쓰는 속도가 더뎌서 더디우스 라고 한 것은 아니다. 더디오란 셋째라는 뜻이다. 한국말로 하면 삼식이나 삼돌이 삼순이 같은 것이다. 이후에는 더디오라는 이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삼식이 더디오로 쓰겠다.
1세기 필사자를 오늘날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생각하면 안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글을 모르던 시절 이들은 오늘날 변호사 이상으로 고소득자이고 학자였다. 바울은 천천히 불러주면 삼식이 더디오는 한자 한자 정성껏 더디게 받아썼을 것이다. 당시에 종이대신 쓰던 파피루스나 양피지는 오늘날 종이처럼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값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전체를 받아 쓰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편지를 끝내가면서 바울은 불러주다 말고 웃으며 삼식이 더디오에게 “네 인사말은 네가 직접 쓰는게 어때?”라고 했을 것이다. 삼식이 더디오도 많은 로마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을 알고 있었다. 바울과 함께 다니면서 함께 신앙 생활하던 많은 유대인 신자들이 로마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쓰다가 갑자기 끼어들어 삼식이 더디오 자신이 직접 인사를 한 것이다.
22절을 원어와 똑같은 순서로 배열하면 중요한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원어 순서대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나 더디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주 안에서 이처럼 원어에서는 “주안에서” 라는 말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위치해 있다. 한글번역이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그리스어와는 달리 “주안에서” 를 “문안합니다”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배치를 했다. 주안에서 문안한다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원어의 순서를 보면 “주안에서 썼다” 라고 해야 한다. 로마서의 다른 곳을 보아도 모두 가까이 있는 말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 안에서라는 표현은 여덟 번 나오니 하나씩 확인해보도록 하자. 14:14절에는 주 안에서 라는 말이 바로 앞에 있는 알고 확신한다를 꾸미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16:2절에서는 주 안에서 라는 말이 바로 앞에 영접한다는 말을 꾸미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16:8절에서는 주 안에서 라는 말이 바로 앞에 나의 사랑하는 이라는 말을 꾸미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16:11절에서는 주 안에서 라는 말이 바로 앞에 있는 안다는 말을 꾸미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16:12절에는 주 안에서 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두 번 다 바로 앞에 있는 수고했다는 말을 꾸미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16:13절에서는 주 안에서 라는 말이 바로 앞에 있는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을 꾸미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어떤 이는 주안에서라는 말이 바로 앞에 있는 기록한다는 말을 해석하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주안에서 인사한다는 표현이 공식적인 인사표현이라고 해석한다. 또 어떤 이는 문법적으로는 주안에서 썼다는 쪽에 무게를 두면서도 주안에서 썼다고 한다면 더디오가 단순한 필사자가 아니라는 말이 되기에 조심스러운 지지를 한다. 그러나 주안에서가 썼다는 단어를 수식한다는 것을 분명히 지지하며 이는 더디오도 단순히 인간 주인의 명령이 아닌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쓴 것으로 고백한 것이다.
주안에서 인사한다는 표현이 공식적인 인사표현이라는 말은 바울 서신에 따르면 맞지 않는 말이다. 로마서에서 주안에서 라는 말이 사용된 일곱가지 예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바로 앞에 나오는 동사나 분사를 수식하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바울 서신 전체에는 주 안에서 라는 표현이 46번에 나오는데 그 중에 고린도전서 16:19절만이 주안에서 인사한다는 표현이 나오고 나머지는 모두 다 주안에서라는 말이 앞에 있는 동사나 분사를 수식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유독 22절만 “주안에서” 가 원어의 배치에서는 머나먼 당신인 “인사한다”를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번역한 것이다.
삼식이 더디오는 단순히 인사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자신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생각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에게 직접 인사하라고 하자 삼식이 더디오는 바울이 불러주는 말들이 바울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닌데도 확신에 차서 자신이 받아쓴 모든 말들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바울은 단순히 인사를 직접 하라고 했다. 하지만 삼식이 더디오는 사도가 불러주는 것과 필사자가 받아 쓰는 것이 주 안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처럼 모든 성경은 인간들이 기록했지만 분명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록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개인적인 편지를 오늘날 성경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바울과 삼식이 더디오의 관계는 마치 하나님과 바울과의 관계와 같다. 삼식이 더디오가 기록하고 있지만 그 말들과 생각들은 여전히 바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불러주고 있지만 그 말들과 생각들은 주님의 것인 것이다.
예수께서도 요한복음 14:26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또 요한복음 16:13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예수께서도 분명히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인데 성령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주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성령님께서 기록자들에게 그대로 들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들려주셨고 바울은 삼식이 더디오에게 들려준 것이다. 삼식이 더디오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바울이 불러주고 자신이 기록한 말씀을 주안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주안에서 란 말은 성령께서 알려주셔서 기록했다는 뜻이다.
바울이 삼식이 더디오가 문안한다고 소개한 것은 삼식이 더디오와 같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을 기록하지 않다. 이제는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말씀을 전파했다.
1526년 Tyndale이라는 사람이 최초로 신약성경을 원어인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했다. 그도 삼식이 더디오처럼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주 안에서 기록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신약성경이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는 것에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리스어로 된 원어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이 되어 있었지만 당시 라틴어도 역시 쓰이지 않는 언어였다. 오직 사제들이나 지식인들만 알고 있던 죽은 언어였기에 일반 백성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없었다. 이것을 세종대왕처럼 안타깝게 여겨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Tyndale은 성령의 감동을 모든 이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라틴어로만 번역되어야 하는데 저속한 영어로 번역했다고 42세의 Tyndale을 묶어서 장작더미 위에 놓고 불에 태웠다.
오늘날은 영어로 된 성경 본다고 불에 태우는 사람은 미국에는 없다. 하지만 사탄은 전략을 바꾸었다. 전에는 사람들이 읽지 못하게 막았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읽지 말라고 한다. 아니,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는 말이 맞겠다. 그래서 사탄의 하수인인 성경학자들은 하나님 말씀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며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란 것을 부정한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가까이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을 가까이해야 한다. 또 그 음성을 마음에 담아 실천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해야 한다. 만약 복음서가 마가가 예수님의 실제 이야기에 허무맹랑한 신화를 섞어 지어낸 소설이고 다른 복음서 기록자들도 그것을 참고하여 꾸며썼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복음서를 면밀히 대조해보면 구전으로 30-40년간 각각 전해지다가 누가가 누가복음 서두에 기록한 것처럼 증언할 목격자들이 죽어가자 글로 적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보고 쓰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마가복음과 다르게 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