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5:1-2 바울 자신을 포함하여 강한 자들인 우리는 약한 자들을 짊어지고 가야 하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고 약한 자들을 기쁘게 해주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둥으로 세워지도록 도와야 한다.
이전 말씀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혼자만 비밀로 간직할 것이고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하지 말라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바울 자신을 포함하여 강한 자들인 우리는 약한 자들을 짊어지고 가야 하고 우리를 기쁘게 하지 말고 그들을 기쁘게 해주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기둥으로 세워줘야 한다는 내용이다.
1995년에 본인이 가르쳤던 제자의 학부모를 전도했다. 그 이듬해였던 1996년 그 가족이 추석 다음날 우리와 함께 지리산 등반을 가자고 제안을 했다. 본인은 딸 예슬이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딸을 데리고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등을 수도 없이 다녔다. 그것도 눈 덮이고 얼어붙은 겨울산을 예슬이 손잡고 수없이 다녔기 때문에 걱정이 안되었다. 하지만 그 가족들은 믿을 수가 없어 갈 수 있겠냐고 몇 차례 확인했는데도 그들은 자신이 있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런데 추석날 제 딸 예슬이가 배탈이 나서 밤새 토하고 설사를 했다. 그래서 등산을 못 가겠다고 그분들께 연락을 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어 제 딸 예슬이가 “아빠, 나 이제 안 아파! 지리산 갈 수 있어!” 라며 벌떡 일어나 가자고 했다. 정말 괜찮은가 싶어 다시 가자고 연락하고 새벽 5시에 지리산을 향해 출발했다. 계획된 코스는 경남 산청군 거림마을에서 세석평전을 올라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로 하산하는 당일 코스였다. 3시간 반정도 운전하여 목적지에 도착했다.
차 한 대는 하산 지점인 천왕봉 바로 아래 마을인 중산리에 놓고 다른 한 대는 출발지점인 거림골에 주차하고 거림계곡으로 올랐다. 1시간 정도 조금 더 갔을 때쯤 예슬이가 털석 주저 앉으며 못가겠다는 것이었다. 산에 가고 싶어 예슬이가 안 아프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꾹 참고 따라오다가 그만 주저 앉은 것이다. 함께 온 가족은 얼마나 앞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셀폰도 없던 때라 참 난감했다. 하는 수 없이 내 배낭에 있던 모든 짐을 아내의 배낭에 옮기고 초등학교 3학년짜리 예슬이를 큰 배낭에 넣어서 지고 세석평전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 만난 미국인 하나가 사정도 모르고 “You’re good father!” 라고 했다.
천왕봉에서 하산할 때 예슬이는 혼자서 걸을 수 있다며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함께 온 가족들이 우리 가족 만큼 속도를 못 내는 것이다. 아무리 재촉을 해도 조금 가다 못 가겠다고 주저 앉아 쉬고 또 일어나서 조금 가곤 했다. 그 가족이 예슬이보다 훨씬 더 큰 짐이 되었다. 우리 가족과 하산했다면 6시에 하산을 완료할 수 있었는데 손전등을 켜고 무려 밤 10시에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올라갈 때는 예슬이가 짐이었는데 하산할 때는 그 가족 모두가 본인에게 큰 짐이었다. 산에서는 본인이 강한 자였기에 약한 예슬이를 지고 5시간을 걸어 올라갔다. 산에서는 본인이 지식이나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제가 전도한 가족보다 강한 자였기에 그 가족을 끝까지 참으며 목적지까지 함께 간 것이다.
오늘 말씀도 이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15:1절은 그리고 라는 말로 14:23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원래 성경은 장과 절 구분이 없었다. 후대에 어떤 사람이 장과 절을 나눈 것이다. 이 부분은 그 사람이 분명 잘못 이해하고 나눈 것이다. 강한 자는 14장에 나온 음식자체가 부정한 것이 없다며 아무것이나 다 먹는 사람들이다. 바울 자신도 여기에 속한다. 약한 자들이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되어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다. 오늘 말씀은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15:1절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지고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스어에서는 우리라는 주어가 동사에 포함되어 있기에 일반적인 경우 우리라는 말을 따로 넣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우리라는 말을 바울은 특별히 강조하여 넣었다. 이러한 강조의 표현은 강한 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바울 자신도 강한 자에 포함이 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어서 새번역에서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번역하고 개역은 담당하고 라고 번역한 말은 원어에서 무거운 짐을 운반한다는 뜻과 참고 견딘다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인이 3학년짜리 예슬이를 지고 산에 오른 것처럼 강한 자는 14장에서 나온 약한 자들을 지고 가야 한다는 뜻이다. 약한 자들을 지는 것은 너무 무거운 짐이기에 참고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1절의 돌보아 라는 말은 4-5절의 인내라는 말과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말이다.
또 이어지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는 무거운 짐을 진다는 말의 반대말인 것이다. 반대로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누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짐 내려놓고 혼자서 가볍게 걷고 싶은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약한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고 혼자 가볍게 걷고 싶은 것이 본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서만 가지 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짊어지고 간다는 말은 요한복음 19:17절에서는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고 할 때 썼다. 또 누가복음 14:27절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한 것처럼 비유적으로 썼다. 로마서의 문맥을 이와 연결해 본다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서 그들을 섬기며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바울 당시 사회와는 반대가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울 당시 사람들은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약한 사람 여럿이 힘을 합쳐 강한 자를 떠받치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고 변화 받은 성도들은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0:44절에 보면 예수께서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셨다.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약한 사람을 지고 가라는 말이다.
또 마가복음 8: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곧 자기 좋을대로 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싫어도 참고 약한 형제들을 지고 가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한 방법인 것이다. 따라서 약한 사람들을 버려두고 자기 혼자 휘바람 불며 편안하게 신앙생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 질서와는 반대로 뒤집힌 사회이다.
어떻게 약한 사람들을 업고 가야 하는지 2절에서 분명하게 보충설명하고 있다. 2절에서도 바울은 역시 우리 각자라고 말해서 바울 자신도 강한 자에 포함됨을 알린다. 우리는 각자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했다. 새번역에서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한다는 말은 1절의 자기를 기쁘게 한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약한 사람들을 업고 가는지 답이 분명하게 나오는 것이다. 2절 대로라면 믿음이 약한 이웃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그들을 업고 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다 해주라는 뜻일까?
감사하게도 원어에서는 "그 선을 위하여" 라는 조건이 바로 뒤에 붙어있다. 개역에서는 덕이라 번역하고 새번역은 유익이라 번역한 말은 약한 자들의 비위를 맞춰주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그 선을 위하여 라는 말이 약한 자들에게 진짜 좋은 것이고 영적 유익인 구원을 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그들의 양심에 거리끼는 걸림돌을 놓지말고 허용하라는 뜻으로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해주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선을 위하고 그들을 세워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원어에는 그 선을 위하여 다음에 세워주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이 붙어있다. 이는 14:19절에 나온 건물을 세운다는 말과 똑 같은 말이다. 이는 14:20절에서 하나님이 건축해 놓으신 것을 무너뜨리지 말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따라서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의 행위로 인해 짜증이 나는 상황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세상 질서는 강한 자들이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면 짜증을 내고 책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의 종의 자리에서 짜증이 나도 참고 그들을 겸손히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14:19에 나온 것처럼 서로 화평을 도모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건설해 나가도록 돕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웃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조건 잘해주는 것이 업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음식 먹는 문제 같은 것은 그냥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 화평을 이루어 그들과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떠 받치는 기둥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바로 약한 자를 업고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