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1-4 음식을 먹는 문제로 서로 업신여기거나 판단하지말고 받아들이라. 판단은 모두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할 것이고 하나님의 종들끼리 서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전 말씀은 지금이 바로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할 때이니 빛의 갑옷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옷 입고 살며 절대로 과거처럼 육신의 생각과 탐욕을 채우려는 삶을 살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로마서 12-13장의 결론은 지금 당장 빛의 갑옷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옷처럼 입고 항상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14-15장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든 내용인데 그 중 14:1-12절은 믿음의 형제들끼리 서로 용납하라는 내용이다. 오늘 나눌 1-4절은 유대교의 음식에 관한 정결법으로 믿음이 연약한 형제들을 비판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14:1절은 원어에서 엉뚱하게도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렇기에 대부분 영어 번역들은 번역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Word to Word로 직역을 하는 번역인 NASB조차도 "Now"로 변역했다. 하지만 그러나 라는 접속사는 이제 다시 로마 교회 안에서 충돌하는 두 그룹을 향해 특별한 권고들을 시작하려는 것이지 의미없이 삽입된 것이 아니다.
로마서 1:1-11:10절까지는 로마교회로 돌아온 유대인 신자들에게 말한 것이고 11:11-24절은 로마 교회 안에 있던 이방인 신자들에게 말한 것이다. 바울은 11:25-13:14절에서 로마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으로 보고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옷 입고 믿음의 형제 사랑, 핍박하는 유대인 원수 사랑, 핍박하는 이방인 원수 사랑으로 사랑의 동심원을 확대하라고 권면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아직도 서로 대립하며 지도권 다툼을 하고 있는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러나" 이제 이렇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한 것이다.
바울은 먼저 믿음 안에서 약한 이들을 영접하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는 말을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해 부적절한 개념을 갖고 있는 자들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 자체가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 어떤 행동들을 허용하는지에 대해 확신이 부족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저으로 말하자면 아직도 음식에 관한 정결법을 버리지 못하는 유대인 신자들이다.
약한 자들이라는 말을 당시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약한 자들이라는 별명이 바울이 붙인 것이 아니라 로마 교회 안에서 그렇게 부르던 말로 노예 계급의 의미로 낮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를 나타낸다. 이 말의 느낌을 상스러운 한국어의 구어체로 번역한다면 "믿음에 있어 병신들!" 이라는 느낌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로마교회로 돌아온 유대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와 일치하기에 로마 교회 안에 있던 이방인들 중 지배적인 계층들이 내뱉은 말일 것이다.
본래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이 로마 교회를 개척했고 클라우디우스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쫓겨났다가 황제가 죽자 로마 교회를 생각해서 앞 뒤 안가리고 이미 정착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돌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상적으로는 경제적 사회정 정치적으로 노예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었는데 다시 돌아와 보니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 율법도 추가로 지켜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을 향해 로마 교회 안에 있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계층에 있던 이방인 신자들이 그들을 믿음 안에서 병자들로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반대로 믿음에 있어 뿐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강한 자들인 이방인 신자들에게 너희들이 보기에 믿음 안에서 병자들인 자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형제가 싸웠을 때 부모가 중재할 때도 먼저 강한 자인 형에게 네가 동생을 이해해주라고 하는 법이다. 여기서 받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다. 함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한 형제로 친밀한 관계가 되라는 뜻이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탈출한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라고 한 말과 같은 뜻이다. 받아들이는 조건이 14:1절에 나온다. 받아들이되 돌아온 유대인들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음식에 관한 정결법과 유대교 절기를 아직도 지키는 것을 문제삼지 말고 무조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2절은 로마 교회 안에 나뉘어 있던 두 그룹을 묘사하고 있다. 한 그룹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쉽게 생각하면 이방인 신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방인 신자들만이 아니다. 바울도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대부분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지만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극복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방인들 뿐 아니라 유대인 신자들 중에도 이 문제를 극복한 사람들까지 포함한다. 이들은 믿음이 강한 자들일 뿐 아니라 숫적으로도 강한 자들이었다.
두번째 그룹은 약한 사람이라고 표현되었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믿음에 있어서 약한 사람 즉 병자라는 뜻이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채소만 먹는다고 했다. 이들은 주로 유대인 신자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 신자 뿐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 유대교에 입교해서 율법을 지키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이방세계인 로마에 살면서 율법에 따라 도축한 정결한 고기를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우상에게 드렸던 고기인지 아닌지도 모르기 때문에 채소만 먹는 것이다.
3절에서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했다. 먹는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반대말이다.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로마교회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지도층이었기에 고기는 이방신에게 드렸던 것 것이라고 안 먹는 사람들을 업신여겼던 것이다. 업신여긴다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out of nothing이란 뜻으로 Absolutely nothing 이란 뜻이다. “재네들 구약의 율법 좀 안다고 까부는데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라는 식이다. 믿음만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로마에서는 노예와 같은 최하층민이었기 때문에 업신여기지 말라고 한 것이다.
먹지 않는 사람들은 먹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다. 비판이란 말은 판사가 재판하는 것이나 운동경기나 음악경연대회의 심판이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먹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적 신분으로는 최하층이었기에 상대를 업신여길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대교 율법을 잘 알던 그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율법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심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심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3절 끝부분에서 왜냐하면 이라는 설명과 함께 나온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마치 잔치의 주인이 반갑게 나와 영접한 손님을 하인이 거지 같은 옷차림이라고 트집잡아 나가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하나님께서 받아들인 그 사람이란 먹는 자나 안 먹는 자 모두 다 가리킨다. 따라서 양쪽 다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4절에서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라고 말한다. 고기를 먹느냐 안먹느냐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는 것이다. 마치 남의 하인을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남의 하인이 주인 앞에 서 있든 넘어져있든 그것은 주인 맘이라는 것이다.
하인이란 주인집에 거주하는 노예이다. 이들은 출 퇴근 하던 노예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하겠지만 주인집에 살면서 함께 밥을 먹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밖에 거주하는 노예들은 밥을 굶는 일이 흔했지만 주인집에 함께 거주하던 노예들은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이들은 주인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주인이 똑바로 서 있으라면 서 있고 엎드려 있으라 하면 엎드려 있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옆집 아저씨가 오더니 엎드려 있는 노예를 보고 일어나라고 하면 말이 되는가? 또 멀쩡하게 서 있는 노예를 보고 엎드리라고 하면 말이 되는가? 그건 정말 우스운 일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또 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성도가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든 그것은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결정할 일이다. 서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주님이시다.
주께서 믿는 자를 구원하시겠다고 했으니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 당시 로마교회 성도들은 서로 자신들이 옳다며 구원받는 것을 마치 자신들이 결정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우리도 남을 함부로 정죄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남의 하인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서로 다른 점이 있더라도 다른 점을 인정하고 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이단적인 신앙이나 범신론적 신앙이나 종교 다원주의 같은 신앙들을 다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출신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른 관습은 인정해 주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