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3:13-14 빛의 갑옷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옷 입고 살며 절대로 과거처럼 육신의 생각과 탐욕을 채우려는 삶을 살지 말라.
12절에서는 구원 받은 자들에게 아직도 과거의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던 습관이 남아있는 것을 밤과 침례 받은 후 어두움의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에 비유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행하는 것을 낮과 빛의 갑옷으로 비유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빛의 갑옷을 입고 낮에 단정히 다니라고 말하며 너희는 믿기 전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던 것처럼 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이다.
13절 첫 부분은 낮에 처럼 단정하게 행하라는 말로 시작한다. 단정하다는 말의 반대는 벌거벗고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2:23절에 보면 개역은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아름다운 것을 얻는다고 번역했는데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키고 아름다운 것이란 그것을 아름다운 옷으로 가린 것을 뜻한다. 따라서 밤과 어두움의 행실이란 마치 생식기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부끄러운 행동들이다. 인간의 본래 죄된 속성인 이기심과 탐욕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는 것이 마치 생식기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부끄러운 행동이다.
반대로 낮에와 같이 단정하게 행하라는 것은 앞에서 빛의 갑옷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옷입으라고 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전군장을 하고 위풍당당하게 걸으라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빛나는 갑옷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고 위풍당당하고 품위있게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묘사할 때 쓴 말이다. 제자들은 도망가라고 했지만 소크라테스는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서양의 기사가 갑옷을 입고 걷는 것처럼 또 한국의 선비와 같이 입은 옷에 맞게 기품있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가운데 살았다. 하지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 비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당당하게 그리스도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이라는 갑옷을 입고 당당히 행했던 사람들이었다.
믿는 자들이 이 밤과 어두움의 행실을 입고 있는 것은 곧 침례 받은 자가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로 이어서 이러한 젖은 옷이 무엇인지 13절 뒷부분에서 구체적으로 밝힌다. 13절 뒷부분은 세 쌍의 짝을 이루는 단어들로 되어 있다. 새번역은 두 단어 사이에 쉼표까지 삽입하여 짝을 이루는 세쌍의 단어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단어들은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이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또 다른 동영상을 중간에 삽입해서 보여주며 젖은 옷이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고대 로마시대의 디오니수스 축제의 장면이다.
첫번째 쌍인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은 이 축제의 1단계이다. 이 두 단어는 술을 흥청망청 마시고 술에 잔뜩 취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고대 로마시대의 디오니수스 축제나 오늘날의 파티와 비슷한다.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하는 것은 주로 자기 자신에 관련된 죄를 나타냅니다. 자기 자신의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이 이 축제의 1단계에 해당한다. 성도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의 이기심과 쾌락을 만족시키는 것에만 재물과 시간을 쓰며 산다면 마치 술에 취해 있는 모습과도 같고 옛사람의 모습이요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쌍은 음행과 방탕이다. 2단계는 1단계의 연속선상에 있다. 술에 취해서 음행과 방탕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음행이란 혼인관계 이외의 성관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특히 디오니수스 축제 중 밤이 깊어 모두가 잔뜩 취한 뒤에 일어나는 일이다. 또 방탕이란 음행과 직접 연결된 말로 그 뜻은 개가 된다는 뜻이다. 개처럼 행동한다는 말은 귀엽게 애교 떤다는 뜻이 아니다. 무분별하게 음란한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이 부분은 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죄를 뜻한다. 자신의 쾌락에 취해 살다 보면 다른 사람과 함께 쾌락을 느끼려 하기 마련이다. 옛사람의 2단계는 주로 다른 사람과 1:1 관계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옛사람의 2단계요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세번째 쌍은 싸움과 시기이다. 이 두 단어는 파티의 끝부분을 묘사하는 말이다. 디오니수스 축제에서 술에 취해서 무분별한 성행위와 음란한 행위를 하고 나면 축제의 마지막은 흔히 싸움이 시작되었다. 상대방의 배우자와 성관계를 갖고 나서 정신이 좀 들면 그 다음에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몇 사람의 싸움이 나중에는 전체가 패를 나누어 싸워 난장판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서로 파를 만들어 싸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앞에서 나온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죄보다 또 다른 사람과 관계 속에서 함께하는 죄보다 더 추악한 죄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죄는 지식이나 부나 명예와 같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파를 나누어 싸우는 것이다. 이 모습은 파티의 마지막에 인사불성이 되어 서로 싸워 난장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모습을 한마디로 말하면 신앙인으로서는 인간말종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나간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이 축제의 3단계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죄들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13절 뒷부분에 묘사된 죄들은 모두가 육신의 욕망과 육체의 쾌락을 쫓다가 일어나는 일들이다. 죄의 모양은 다르지만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같이 3단계로 죄가 판을 칠 수 있다. 첫번째 죄는 자기 혼자서 짓는 죄이다. 두번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이다. 마지막 단계는 교회 전체가 패를 나누어 다투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파괴적인 죄는 싸움과 시기이다. 오늘날 교회도 육체의 욕망을 쫓다가 서로 파가 나뉘어 싸우다가 교회가 갈라지기도 한다.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위해서 싸우기 보다는 인간적인 이기심과 명예심 때문에 싸운다. 이것은 가장 추악한 죄이다.
혹시 나는 저렇게 술마시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는가? 핵심은 술마시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이 비유를 통해 말하려는 핵심은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면 아직도 침례 받은 뒤 젖은 옷을 그냥 입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주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미워한다면 아직도 젖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고 어두움의 행실을 입고 있는 사람이다.
14절은 빛의 갑옷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처럼 입고 정욕을 향해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으라는 말은 항상 옷을 입고 다니는 것처럼 그렇게 항상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또 네 원수가 네 이웃이라고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도 젖은 옷 입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어두움의 행실을 입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자기 자신만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모른다면 우리는 디오니수스 축제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고 나서 난장판을 벌이며 싸우는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젖은 옷 즉 육체의 행실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한다.
1964년쯤 필자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으로 기억한다. 어머니께서는 양재학원을 졸업하신 뒤 새하얀 천으로 필자의 웃옷을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그 옷을 입혀 저를 외가에 데리고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옷은 단추를 뒤에서 잠그는 것이었다. 대부분 아이들은 앞으로 단추를 잠그는 옷을 입었기에 어린 마음에도 그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웠다. 지금 같으면 누가 뭐라고 하면 당당하게 “어머니께서 날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서 입혀주신 옷이야!” 라고 했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손수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입혀주신 사랑의 옷도 부끄러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직 어리고 신앙적으로 미숙하다면. 하지만 장성한 우리라면 그럴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심으로 입혀주신 그 옷을 부끄러워하면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옷을 입고 당당하게 걸으며 성도로서 기품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14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으라고 한 것이다. 사관생도가 제복을 입으면 옷에 맞게 기품있게 행동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육신의 욕망이라는 젖은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갑옷을 입었으니 이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가지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11-13절에서 바울은 계속 1인칭 복수인 우리를 사용했다. 원어에서 12절은 “우리 함께 어두움의 옷을 벗자! 우리 함께 빛의 갑옷을 입자!” 이다. 그리고 13절은 “우리 함께 단정하게 행하자!” 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4절이다. 갑자기 2인칭으로 바뀐 것이다. 14절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여러분은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라는 뜻이다.
계속 우리라고 하다가 갑자기 여러분이라고 할까? 이는 바울 자신은 이미 어두움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빛의 갑옷을 입은 자로서 위풍당당하게 걷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러한 명령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은 아직도 육신의 생각과 탐욕을 따라 어두움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침례 받은 후 젖은 옷을 계속 입고 다니는 것처럼. 그러니 로마교회 성도들도 바울 자신처럼 어두움의 옷을 벗어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옷을 입으라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함께 벗자 우리 함께 입자 우리 함께 기품있게 걷자” 라고는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함께 이렇게 합시다” 라고는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저도 잘 못하지만 “함께 이렇게 합시다” 라고는 큰 부담없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14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을 옷처럼 입었으니 너희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으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옷입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너희는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없다. 바울은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로 옷입었기에 당당하게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으라” 라고 말한 것이다. 한마디 덧붙인 말은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도 역시 너희는 이란 말이 앞에 붙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