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 이웃의 범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원수까지 포함한다. 그러한 사랑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다 이룬 것이다.
9절은 왜 사랑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빚을 다 갚는 것인가 하면 여러 계명들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다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라 했다. 이어지는 10절은 9절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여 부정어로 말하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내용이다.
10절은 9절에서 말한 내용을 다시 요약하고 있다. 9절에서 나온 모든 내용은 자기 욕심 때문에 이웃에게 해를 끼친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요약해서 다른 말로 한 것이다. 이는 이웃사랑의 뜻을 분명하게 전하기 위해 부정어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시편 15:3에도 “친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유대교 랍비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해오던 이웃 사랑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유대교나 기독교나 차이가 없는 셈이다. 세상사람들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똑같은 셈이다. 유대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나 모든 단체가 다 똑같이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차이는 분명히 있다. 그 차이는 누가 이웃이냐에 있다. 누가 이웃인가? 엣세네파 사람들은 함께 쿰란 동굴에서 생활하던 공동체 구성원들 만이 이웃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원수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했다. 유대인들에게 원수란 모든 이방인들이었다. 따라서 바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공동체 안에 속해 있던 사람들끼리 이웃이라고 불렀다.
누가복음 12:29절에 보면 영생의 길을 질문한 율법교사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답을 듣고 나서 누가 이웃이냐고 물은 내용이 나온다. 이는 그 율법교사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모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이다. 단지 차이는 누가 이웃이냐는 것이다. 그 율법교사는 자신들과 같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이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한 대답대신 사마리아 사람이야기를 하셨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만도 못하게 여겼다. 그렇게 멸시당했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원수로 여겼다. 이 비유에서 강도만난 유대인의 존경받는 이웃들이 그냥 지나간다.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간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목사님도 그냥 지나가고 전도사님도 그냥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개 만도 못한 사마리아인은 원수인 유대인을 보고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옮겨 치료비를 주면서 돌보아주라고 한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원수로 여기는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 교회 성도끼리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조직폭력배들조차 자신들끼리는 사랑한다. 그런데 오늘날 믿는 자들은 믿음의 형제자매들끼리 가끔 다투기도 한다면 우리는 조직 폭력배 수준만도 못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달라야 한다. 우리의 이웃은 믿음의 형제자매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미움 받는 것보다 사랑 받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7:12에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과 크리스천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웃 사랑에 있지 않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점은 유대인들이나 크리스천들 모두 일치한다.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미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차이는 누가 이웃인가에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이웃은 함께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믿음의 형제자매들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까지 다 포함하는 것이다.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 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인 것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은 원수들에게도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6:15에 보면 제자 중 한 명이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 중 한 명의 귀를 잘랐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며 못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원수에게 조차도 해를 입히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10절에서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도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다. 여기서 이웃은 원수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 가르치신 이웃사랑의 범위와 정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이다. 죽었어야 할 우리가 그분의 죽음으로 인해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세운 사랑을 경계선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우리는 빚을 갚아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되돌려 드려서는 안된다. 그분이 안 받겠다고 하시며 대신 서로에게 사랑의 빚을 갚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물론 성도끼리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끼리만 사랑하면 안된다.
우리 끼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계선 밖에 있는 우리를 핍박하는 원수들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모든 계명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이 사랑을 다시 정의하면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이고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원수를 이웃에서 제외시켰지만 예수님은 포함시킨 것이다. 바울도 그 가르침을 따라 로마제국의 지도자들에게 세금과 함께 존경을 바침으로 사랑하라 한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들은 성경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도행전 7:59절에 보면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의 11제자들도 요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사랑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바울도 역시 그 사랑을 증거하다가 죽었다.
이러한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은 성경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End of the Spear 라는 영화는 에쿠아도르 정글에 살던 와다니 족 사람인 민카야니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다섯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1956년 와다니 족에 의해 창에 찔려 죽었을 때 말로 다 할 수 없는 변화들이 죽임당한 선교사 가족들은 물론이고 민카야니와 와디니 족들에게 일어난다. 죽은 선교사의 부인들이 와다니 부족에 들어가서 그들을 치료해주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한 선교사 부인들의 사랑에 Mincayani와 와다니족이 변화되어 예수 믿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런 분들은 미국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손양원 목사라는 분은 1948년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을 잃었다. 목사님의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좌익 학생들에게 총살당했던 것이다. 반란이 진압되고 범인들이 잡혔을 때 손목사님은 아들들을 죽인 뒤 시신에 확인 사살까지 했던 안재선을 살려 달라고 해서 양자를 삼았다. 안재선은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손목사님은1950년 피난 가라는 권고도 물리치고 나병환자들과 함께 병원과 교회를 지키다가 1950. 9.28 북한군에게 총살을 당했다.
젊은 선교사들의 부인들은 와다니 족이 사랑스러워서 사랑한 것이 아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아들을 죽인 원수가 사랑스러워서 아들 삼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신 명령이기에 싫어도 순종한 것이다.
사랑스러운 아들 딸과 예쁜 손자 손녀를 보면 사랑스럽다. 어느 성도님은 손자 손녀들 바라보며 이런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누구나 다 하는 사랑이다. 심지어는 동물들과 물고기들까지도 다 하는 사랑이다.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하는 형제자매만 사랑한다면 그것도 사랑은 사랑이지만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과 똑같은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은 달라야 한다. 우리의 이웃은 바로 우리의 원수들이다. 원수들까지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다른 점이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믿음의 공동체의 경계선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상관없이 용서하고 친절을 베풀고 참으시며 그들을 축복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여전히 분노는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는 사라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남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이기에 싫어도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줘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복음 전파를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