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6-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대로 예언하는 사람이면 그리스도의 표준으로 재어본 것에 따라 예언할 것이고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각자 자신이 받은 것에만 집중하라.
이전 말씀은 왜냐하면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서로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고 각 사람은 그 지체가 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로마서 12:6에서 이러한 다양한 역할들을 은사라고 번역했다. 로마서에서 은사로 번역된 말은 원어에서 karisma이다. 은혜란 값없이 베푸는 호의라는 뜻의 karis이고 은사는 값없이 호의로 받은 선물이라는 뜻의 karisma이다. 같은 어원의 단어를 동시에 사용한 것은 값없이 받은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영적인 은사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은사들을 영적인 것이란 뜻의 pneumatikos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신령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로마교회에서는 기능적인 일들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선물인 교회에서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선물이란 뜻의karisma를 사용한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리스도라는 표준으로 재어보고 다른 사람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관계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 협력하여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각자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안해서 큰 혼란이 생겼던 것이다. 제대로 안했다는 말은 겸손히 행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자신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로 각자의 할 일을 받았는데 은혜로 거져 받았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것이다. 그래서 로마교회에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지도권 다툼이 생겼던 것이다. 서로 지도자의 역할을 하려고 하다 보니 교회가 분열이 될 위기에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구원의 자리에 섰다는 것을 잊기 쉽다. 교회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도 그리스도라는 표준으로 재어 본다면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각자가 맡은 역할이 거져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각자가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잊고 세속적인 질서를 따라 서로 자기를 높이려 하다보니 서로 다투고 결국 분열이 되기까지 한다.
받은 선물은 6절 뒷부분부터 나온다. 첫번째 선물은 예언하는 것이다. 예언이란 미래의 일을 알아맞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사람들 앞에서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이 바로 예언이다. 오늘날 말로 바꾸면 하나님의 공식 대변인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언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오늘날처럼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 집사였던 빌립이나 스데반도 사도였던 바울이나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오늘날 목회자가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에게 분명히 전한다면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예언이다.
예언을 할 때는 믿음의 정도에 맞게 하라고 했다. 믿음의 정도란 말은 3절의 믿음의 분량과 비슷한 말이다. 문자적인 뜻은 믿음의 비율이란 말이다. 이는 3절의 믿음의 자로 잰 것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믿음의 분량이라는 말이 더 철지히 믿는 믿음의 분량이 많은 사람이 더 큰 예언의 은사를 갖게 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으로 볼 때 이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어떤 이는 더 큰 분량을 가졌고 어떤 이는 더 작은 분량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기준을 주셨는데 그 기준을 넘어서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자기의 생각을 전한다면 그것은 거짓 예언이 된다. 어떤 이는 이 말을 믿음의 표준에 따라 믿음에 부합하여 라는 뜻으로 설명하며 예언하는 자들은 그들이 가진 표준에 일치하도록 예언을 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어떤 것도 전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믿음의 정도라는 말은 설교자가 전한 내용이 공동체에서 점검해야 한다는 의미로 설명한다. 그러나 믿음의 표준인 그리스도를 따라 재는 것은 각자 자신이 받은 것을 재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섬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은 각자 자신이 받은 것만 하라고 했기에 설교자가 전한 내용을 공동체가 점검해보라는 뜻으로 볼 수는 없다.
만약 설교자가 그리스도의 표준을 따라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전하게 되고 그러한 말씀에 사람들이 순종하는 것을 보고 교만해져서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오늘날 설교자도 마찬가지 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그 음성을 듣고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그 말씀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표준에 맞는지 항상 점검해봐야 한다.
두번째 선물은 섬기는 일이다. 원래 이 말은 원어에서 diakonia 인데 식탁 옆에서 시중을 드는 것을 뜻한다. 영어의 deacon이 diakonia에서 왔다. 오늘날 직분처럼 정해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섬기던 역할을 가리키는 것이다.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섬기는 역할을 맡게 되면 인정을 받으려 하고 나 봐라 하고 광고하려 한다. 그래서 지도자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 그렇게 하지말고 섬김의 역할만 잘 하라는 것이다.
세번째 선물은 가르치는 일이다. 역시 사람보다는 하는 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르치는 일이면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라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이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첫번째 선물인 예언과 같은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예언이란 오늘날의 설교처럼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르친다는 것은 가르쳐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도 마 28:19에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또 누가복음 10:1-18에서 예수께서는 70인의 제자들을 가르치신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뒤에 그대로 하라고 파송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르치는 역할을 맡으면 역시 지도자의 자리에도 앉으려 하기 때문에 가르치기만 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