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33-36 하나님의 부유하심과 지혜와 지식이 어찌나 큰지 측량할 수 없다며 하나님은 새로운 피조물의 근원이시고 새로운 피조물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이시기에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분이시다.
이전 말씀에서는 이방인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은 것처럼 이스라엘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것을 보고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자신들의 힘으로는 절대 탈출할 수 없는 불순종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두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라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의 부유하심과 지혜와 지식이 어찌나 크고 깊은지 헤아릴 수 없다는 찬양이다.
33절은 원어에서 “오!” 라는 감탄사로 시작한다. 이는 마치 알프스산이나 로키산 꼭대기에 서서 깊은 산골짜기들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장면과도 같다. 바울은 “깊도다” 라고 말하며 다음 세가지 깊이에 감탄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유하심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지식이다. 새번역에서 부유하심은 크다라고 하고 지혜와 지식은 깊다 라고 한 것은 의역한 것이다. 부유하심이 깊다라고 하면 한국말로 말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어에서는 세가지 모두 다 깊다는 것이다. 개역성경은 “깊도다” 라고 시작한 것은 원어대로 잘 번역한 것이다.
개역과 개역개정의 문제는 그 다음에 나온다. 개역은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 이라고 했고 “개역개정은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 이라고 번역했다. 둘 다 부요함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으로 번역했다. 성경 해석자들도 일부는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지혜와 지식은 부요함에 속한 것으로 해석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유함을 독립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어의 구조를 보면 이 세가지는 모두 다 독립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영어로 말이 안되도 원어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ESV, NLT, RSV는 이 세가지를 원문 그대로 독립적으로 번역했다. 세가지를 따로 해석하는 것이 이어지는 내용과 연결해 볼 때도 맞다. 세가지를 독립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영어나 라틴어에서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시적인 흐름상 독립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부요함이란 무한한 자원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기에 세가지를 독립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부분은 새번역이 더 원어의 시적 구조를 잘 살려 번역했다.
첫째 부유하심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말한 것이다. 에베소서 3:8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근거로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하심으로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을 미리 바라보며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지혜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신비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얼마나 깊은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지식이란 11:2에 나타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미리아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지식이 얼마나 깊은지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깊이를 그 다음 두가지로 요약해서 강조하고 있다. 첫째 누가 하나님의 재판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라고 했다. 헤아려 안다는 말은 수가 많은 것을 센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앞에서 나온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재판으로 자비를 베푸셔서 구원한 새로운 피조물이 얼마나 많은지 셀수가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 이는 앞에서 나온 지혜와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신비한 비밀과 하나님의 미리아심은 복잡한 미로와 같다는 것이다. 너무나 오묘하고 복잡해서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어서 수식하는 말을 보아도 부유함은 따로 해석되어야 한다.
34절 앞에 원어에는 왜냐하면 이란 말이 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깊이를 알 수 없는가 하면 이란 말이다. 34-35에 나오는 세개의 질문은 앞의 부유하심과 지혜와 지식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 순서는 거꾸로 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종이에 여러가지 물감을 떨어뜨리고 반을 접어서 만든 그림과도 같다. 33절과 34절 사이를 접으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이러한 바울의 찬양은 마치 데칼코마니 같다.
첫째 질문은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으며 이다. 안다는 말은 33절 끝에 나온 지식이란 말과 같은 말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미리 아시고 구원하실 마음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누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느냐는 것이다.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 대답이다.
두번째 질문은 누가 주님의 조언자가 되었습니까 이다. 조언자란 지혜있는 말로 조언해주는 사람이다. 역시 33절 두번째의 지혜라는 말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신비한 비밀에 관해 조언해 준 사람 없다는 것이다.
세번째 누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란 33절 첫번째의 부유하심과 관련있는 말이다. 따라서 부유하심 지혜 지식은 모두 독립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들을 만드실 때 기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세가지 질문 모두 대답은 Nobody! 이다. 이 세가지가 앞에서 나온 부유함과 지식과 지혜와 반대 순서로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기에 세가지는 독립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원어에는 36절 맨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역시 세가지를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첫째 그에게서 나고 란 말은 새로운 피조물들의 근원이시란 말이다. 둘째 그로 말미암아 있고 란 새로운 피조물을 위한 구원을 베푸는 자라는 뜻이다. 그를 위하여란 그가 영광을 받으실 존재라는 것이다. 만물이란 하나님의 창조물을 뜻하는데 바울의 마음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 모두를 가리킨다. 그에게 영광이 란 말은 인간적인 자랑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다. 그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기원하며 찬양을 마무리하고 있다.
따라서 신비한 비밀을 깨달은 자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미리 바라보고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최선을 다해 찬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