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17-18 참 올리브 나무인 이스라엘의 일부가 잘려 나가고 그 자리에 돌 올리브 나무인 이방인 신자들이 그 자리에 접붙임을 받아 참 올리브나무의 뿌리인 이스라엘 조상들의 신앙의 영양분을 받고 있다면 이스라엘을 향해 교만하면 안된다.
이전 말씀에서 바울은 그들의 버림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다면 그 받아들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며 처음 익은 곡식가루가 거룩하면 나머지도 거룩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하다고 이방인들에게 교만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올리브 나무 접붙이는 비유를 통해 이방인 신자들에게 교만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이다.
17절부터 24절까지는 접붙이는 비유로 말하고 있다. 역시 이방인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깨달으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유대인을 참 올리브나무에 비유했고 이방인들을 돌올리브 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17-18에 보면 참 올리브나무인 이스라엘이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 가지 일부를 잘라내었다. 잘라냈다 또는 꺾였다는 말로 번역된 말은 칠십인역 구약성서 레위기 1:17에서 비둘기의 날개를 찢는다는 말을 제외하고는 신구약 전체에서 로마서 11:17-20절에서만 세번 나온다.
여기서 돌 올리브 나무는 러시안 올리브 나무(Eleagnus angustifolius)가 아니라 올리브 나무가 자연적으로 다르게 퇴화된 것으로 질은 떨어지지만 올리브 나무처럼 기름을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러시안 올리브 나무는 모양은 올리브 나무와 비슷하지만 다른 종이다. 올리브 나무의 꽃가루가 날려 섞이면서 자연적으로 열매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본래는 그렇게 잡종이 된 나무가 열매는 질이 떨어지지만 나무는 더 강하기에 돌 올리브 나무에 참 올리브 나무를 접붙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면 돌 올리브 나무의 강한 점과 참 올리브 나무의 좋은 열매의 장점들이 살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반대로 바꾸어 비유로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비유가 현실적인지 아닌지 따질 것이 아니라 비유가 담고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 원 가지가 병들어 못쓰게 생긴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다. 다른 건강한 가지들까지도 같은 병에 걸리기 때문이다. 구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병들어 못쓰게 된 가지를 잘라내는 역사이다. 그렇게 해서 남은 가지가 이사야에 나오는 남은 자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바울 당시 이스라엘은 대부분 잘려 나가고 건강한 가지가 별로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곳에 돌 올리브 나무를 접붙였다는 것이다. 참 올리브 나무 가지의 일부가 잘려 나갔다고 했기에 모든 이스라엘이 다 잘려 나간 것은 아니다.
뿌리는 16절에서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다. 그 결과 참 올리브나무의 뿌리인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과 연결되어 그들의 신앙의 풍부한 양분을 함께 받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함께 받는다는 말은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뜻인데 고린도전서 9:12절과 빌립보서 1:7절에서는 은혜에 함께 참여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은혜를 함께 받는 자들이 되었기에 고난도 함께 받는 자들이 된 것이다. 다른 단어이지만 에베소서 3:6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이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이 나온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18절에 나온다. 이방인들이 참 올리브 나무에 접붙인 바 되어 참 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믿음의 양분을 함께 받게 된 것이라면 본래의 가지였던 이스라엘에 대해 우쭐대고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인 이스라엘 조상들의 믿음이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왜 우쭐대고 있을까? 원가지였던 이스라엘이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마음에도 유대인들을 경멸하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신구약 성경을 자세히 공부하다 보면 유대인들을 경멸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하는 모습은 곧 교회 역사의 모습이기도 하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거룩해서 남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 때문이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집에 있던 탕자가 돌아온 탕자를 경멸하는 것과 같은 태도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