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19-21 모세는 이방인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질투심을 일으키겠다고 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을 찾거나 구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가겠다고 했다는 것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하나님은 그래도 이스라엘이 돌아오길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다.
이전 말씀에서는 유대인들 중에 모든 사람이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니라며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것에서 생기지만 복음이 로마제국 영토 전체에 다 퍼졌기에 유대인들은 못 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스라엘은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다며 신명기와 이사야를 증거로 들어 추궁하는 내용이다.
이미 들었는데도 유대인들은 또 변명한다. 듣기는 들었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잘 몰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신명기와 이사야를 인용한다. 신명기는 율법서이고 이사야는 선지서이다. 따라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구약성경 전체를 대표하는 두 사람을 인용하며 성경 전체의 권위를 근거로 아무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듣기는 들었지만 몰랐다고 하자 바울은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는지 질문한다. 원어에는 알지 못하였느냐 라는 말 바로 다음에 “먼저” 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먼저 라는 말을 앞에 붙여서 이스라엘이 이방인들보다 먼저 알지 못했느냐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18절 첫 부분과 19절 첫 부분은 똑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만약 이스라엘이 먼저 알지 못했느냐가 되려면 18절에서도 이스라엘이 먼저 듣지 못했느냐는 말이 나와야 한다. 이어지는 19-20절에서 또한 이사야의 글이 제시되는 것으로 보아 모세에게 먼저 말했다는 해석이 옳다고 본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은 모세에게 먼저 말했다는 뜻으로 번역한다.
이는 검사가 심문하듯 추궁하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신명기 32:21절을 증거로 제시한다. 신명기에 나타난 모세의 글은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로 너희의 질투심을 일으키고 미련한 백성들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겠다는 것이다. 내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말한다. 미련한 백성이란 이해가 없는 백성들이란 뜻이다. 역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말한다.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구원받지 못하고 슬피 울면서 이방인들에 대해 질투심과 분노를 표시한다는 것이다.
이는 같은 말씀이 전파되었는데 이방인들은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 말씀을 알지 못하는 미련한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어려서부터 배우면서 자란 너희가 듣고도 몰랐다는 것이 말이냐 되냐는 반문인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불신을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잘 표현하셨다. 모든 땅에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하지만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은 오직 좋은 땅 뿐인 것과 같다. 모두가 똑같이 복음을 듣지만 마음의 땅이 돌처럼 딱딱하다는 것이다. 길처럼 굳어져 있다는 것이다. 또 가시덤불과 같은 근심걱정에 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못 들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똑같이 들었다. 모두가 들었다는 말은 결국 모두가 이해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무지한 이방인들도 다 듣고 믿었기 때문에 절대로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가 이해했지만 마음 밭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에 새기지 않고 지나쳐버렸다는 것이다.
모든 불신자들의 마음도 이와 같다. 이미 자신들의 생각은 정해져 있고 듣고 이해했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다. 갈릴레오는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갈릴레오는 로만 카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고소를 당했다. 갈릴레오가 그의 망원경으로 그가 발견한 진리를 증명하려고 했을 때 로만 카톨릭 사람들은 거절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다. 또 자신들의 생각과 반대되는 증거가 있어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도 동일하게 눈이 가리워졌다. 그들은 이미 마음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예수께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시며 천국을 선포했지만 믿지 않았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수많은 목격자가 증언했지만 믿지 않았다. 저들은 복음을 듣고 분명한 증거를 본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핑게가 될 수 없다. 미련하고 배움이 없는 사람들도 똑같은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믿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글도 역시 이방인들의 반응을 나타낸 것이다. 20절은 이사야 65:1을 인용한 것이다. 그 내용은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주고 나를 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를 찾지 않은 사람들이란 하나님을 찾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는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러주시고 만나주셨다는 것이다. 나를 구하지 않은 사람이란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즉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찾았다고 보았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찾아가는 분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찾으셨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이미 하나님께서 저들을 부르셨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님을 부름에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2:1-14절에서 혼인잔치의 비유로 같은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고 이스라엘을 부르셨지만 저들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천국잔치에 참여할 사람을 찾았지만 오지 않았다. 진노한 하나님은 초대받지도 않은 사람들을 부르셔서 혼인잔치에 앉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은 것이다. 바울당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지만 유대인들은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듣기는 들었지만 몰랐다는 변명이 통할 수 없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가운데 듣기는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셨는가? 절대로 아니다. 이처럼 귀를 막고 듣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이사야 65:2절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손을 내밀었다는 말은 안아주려고 두 팔을 벌렸다는 뜻이다. 누구를 향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인가? 이스라엘을 향해 온종일 팔을 벌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란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이다. 복종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거역했다는 말은 볼멘소리로 말대꾸하는 것을 말한다. 못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대꾸하며 심지어는 욕하는 것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못된 아들 같은 이스라엘이지만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하루 종일 두 팔을 벌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이란 하루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팔을 벌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루 종일 팔을 벌리고 계시지만 이스라엘은 아무 반응이 없다. 하나님은 그저 허공을 향해 팔이 아프도록 팔을 벌리고 계신 것이다. 이 말씀을 보니 하나님께서 벌서고 계시다는 생각이 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벌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해 팔을 벌리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 모두에게 팔을 벌리고 계신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을 벌 세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