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32-33 이스라엘이 씨만 남기고 다 망한 이유는 믿음으로부터 좇아가지 않고 행위로 좇아가다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걸려 넘어졌기 때문이다.
이전 말씀에서 유대인들은 다 망하고 씨만 남았지만 의를 쫓아가지도 않은 이방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이스라엘은 의롭게 하는 율법을 잡으려고 쫓아갔지만 잡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씨만 남고 모두 망한 이유를 이사야를 인용하며 설명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이렇게 의롭다함을 얻은 이방인과 얻지 못한 유대인을 비교한 후 다시 질문한다. 32절에 보면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라고 질문한다. 유대인들의 문제점을 진단하여 병의 원인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믿음이 아니라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어에서 이 부분은 동사가 생략되었다. 만약 여기서 생략된 것이 “to be”이고 주어가 율법으로 해석한다면 이스라엘은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추구했지만 그러나 율법이 믿음으로 된 것이 아니라 행위로 된 것이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과 다수의 주석가들은 여기서 생략된 동사가 30절과 31절에 나온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는 단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믿음으로부터 달리며 좇아가지 않고 행위로부터 달리며 좇아갔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헬기타고 우리 앞에 내리시듯 우리에게 오신 것과도 같다. 헬기에서 내리신 예수님은 오셔서 금화를 그냥 나누어주시며 받으라고 하신 것처럼 믿음으로 귀한 구원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그렇게 값진 것을 어떻게 그냥 받을 수 있느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거부한 것이다. 대신에 헬기 타고 날아가시는 것 같은 주님을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 받겠다고 맨발로 죽도록 달리기 하듯 한 것이 바로 병의 원인이었다.
믿음이 아니라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한 결과가 그 다음에 나온다. 걸림돌에 걸려서 넘어졌다는 것이다. 걸림돌에 걸려서 넘어졌다는 말은 걸어가다가 넘어졌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빠른 속도로 달아나는 목표를 따라가려고 보지도 않고 죽을 힘을 향해 달리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다는 말이다. 살살 넘어졌겠는가? 게다가 그 돌은 작은 돌아 아니라 거대하고 펑퍼짐한 바위이다. 바위 위에 내던져져서 개구리처럼 뻗었을 것이다. 죽지는 않았겠지만 심각한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 돌이 무엇을 뜻하는가? 고린도전서 1:23에 보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라고 했다. 유대사람들에게는 거리낌이라고 했는데 역시 걸려 넘어지게하는 돌이란 뜻이다. 따라서 걸림돌이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말한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라는 걸림돌에 걸려 박살난 것이다. 하지만 달리지도 않았던 이방인들은 그 기쁜 소식을 믿었다. 그 바위 위에 올라서 그 바위를 의지하고 살면 영생을 얻는다 하니 기쁨으로 그 반석 위에 올라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부딪혀 중상을 입힌 돌이지만 듣고 순종한 이방인들에겐 구원의 반석이다. 유대인들은 왜 부딪혔을까요? 그들의 시야가 좁아서 그런 것이다. 자기들이 정한 수 없는 율법들에 시선이 꽂혀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사야 8:14절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경기 규칙을 알려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미 선수들을 모아 놓고 앞에 큰 바위가 놓여있다고 하셨다. 그 바위 위에 올라가야 상을 받는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그렇게 쉬운 것이 어떻게 경기가 될 수 있느냐며 듣지도 않고 자신들은 이미 다 안다며 하나님 말씀까지도 무시한 것이다. 이것은 또 마치 Detour라고 경고판을 달았는데도 무작정 자동차를 몰아 바윗덩이에 부딛히고 차가 박살난 것과도 같다. 내가 달리기 한 두 번 해보았나? 또는 내가 운전 한 두 번 해보았나? 하면서 경고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경고의 내용은 시온에 넘어지게 하는 돌과 부딪히게 하는 바위를 놓았다는 것이다. 이 돌이나 바위는 넘어지라고 놓은 것이 아니라 올라가라고 놓은 것이다.
시온이란 예루살렘을 뜻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산 이름이 시온산이다. 돌이란 구약에서 왕이신 메시야의 오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2:10을 보면 시편 118:22을 인용했는데 이는 집 짓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했다. 이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3:11에서는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다고 했다. 또 바위란 원어에서 Petros인데 영어로 Peter이고 반석이라는 뜻이다. 이 반석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그리스도라는 반석을 이미 놓았다는 것을 알고 그 반석을 믿고 그 반석 위에 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도 저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달리다가 걸려 넘어져서 코가 깨지고 이마도 깨지면서 부끄러움을 당한 것이다.
왜 이렇게 경고했는데도 그냥 바위에 헤딩해서 박살이 났을까요? 그 원인은 유대인들의 교육에 있다. 유대인들은 어린 소년들에게 아주 꼼꼼하게 구약을 가르치고 유대교 전승을 주의 깊게 가르친다. 이 유대교 전승들은 주로 바벨론 포로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그 가르침 자체가 구약성경에 반대되는 내용들이었다.
바벨론 포로 이전엔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의 리더였다. 하지만 포로기 이후엔 회당에서 이러한 전승들을 가르치는 랍비들이 리더가 되었다. 가르침을 중요시하다보니 랍비들은 특별한 존경을 받았다. 존경받다 못해 나중엔 하나님의 자리에 까지 앉은 것이다. 그런 저들을 예수께서 책망하신 것이다. 유명한 랍비들은 무덤조차도 공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 뜻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요 8:19에서 “너희는 나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른다” 라고 하셨다.
저들이 예수님 당시에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절대 아니다. 이사야 1: 10-14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헛된 제사만 드리고 각종 절기를 지키면서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했다.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지키는 제사와 절기들이 하나님께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너무 지쳤다고 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5:8-9에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고 이사야 29:13을 인용하셨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이사야 시대의 유대인들이나 똑같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자기들이 만든 사람의 훈계란 유대교 전승들을 말하는데 그것을 어린아이들에게 철저히 가르쳐 계속 이어지게 했던 것이다. 오늘날 유대인들도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 시대와 똑같다. 왜냐하면 저들의 가르침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변함없는 이스라엘에 대해 유대인출신 크리스천인 Sanford Mills 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스라엘은 그 영혼의 선장, 즉 그 배의 주인이 되길 원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방향타와 나침반을 잃어버렸고 이제 그 배는 죄의 소용돌이 근처로 질주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지옥의 소용돌이에 빠져가는 이스라엘을 구해줄꼬?” 이것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상태이다. 바울시대의 이스라엘의 상태처럼.
참 놀라운 것은 이사야 시대부터 바울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은 똑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린아이 때부터 유대교 전승들을 철저하게 가르쳐온 탓이다. 어린아이들은 하얀 천과도 같다. 어릴 때는 물들기는 쉽지만 한번 잘못 물들면 지울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어릴적 신앙교육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교회에서 교육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교회에서 전도사님들은 방향을 제시해줄 뿐이다. 가정에서 여러분들이 시범을 보이며 삶에서 반석이신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