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4-17 하나님께는 불의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께서 불쌍히 생각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다.
이전 말씀에서 이삭과 이스마엘과는 달리 에서와 야곱은 똑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데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이라는 원리에 따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께는 불의가 전혀 없다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유대인 신자는 불공평하다고 불평을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1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뭐라고 말해야 하겠느냐?” 라는 말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미리 아시고 미리 예정하셔서 선택하셨다면 그에 대해 우리가 뭐라고 말해야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을 원어 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에게는 불의가 없느냐?” 라는 뜻이다. 개역이나 새번역 뿐 아니라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도 여기서 부정어를 빼고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번역했다. 직역을 고집하는 NASB만이 “There is no injustice with God, is there?” 라고 번역했지만 역시 원어에 없는 “is there?”를 넣었다. ESV는 부정어로 되어있는 이러한 원어의 의미를 살려 “하나님께는 불의가 조금도 없느냐?” 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대부분 여기서 부정어로 된 질문이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강한 부정어로 시작하는 말은 하나님에게는 불의의 개념이 하나님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영어 번역에서는 이러한 부정어가 거의 필요없기에 뺀 것이다. 이러한 부정어가 한국어나 영어의 어법상 잘 통하지 않기에 부정어를 빼고 번역하거나 의미상 번역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번역으로 인해 질문 자체에 이미 담겨있는 절대로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느낌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이어서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라고 단호하게 답한 것이다. 하나님께는 절대로 불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15절은 왜냐하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말로 시작하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출애굽기 33:19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 내용은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는 것이다.
16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15절에서 인용한 내용에 담긴 하나님의 하나님의 원리를 정리해서 설명한다. 새번역은 원어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있다고 의역을 해 놓았다. 하지만 원어는 개역처럼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달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이라는 뜻이다.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인간의 욕망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이 받고 싶다고 간절히 원한다고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아무리 심장이 터지라고 죽도록 달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자비를 상으로 받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원해도 안되고 아무리 죽도록 달려도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려있는 것이다 란 뜻이다.
17절에 갑자기 뜬금없이 출애굽기 9:16을 인용한다.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려고 바로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이 말이 불쌍히 여기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우리는 어떤 사람을 불쌍히 여길까? 만약 우리가 두 사람에게 천 오백 만 원을 빌려주었다고 하자. 왜 빨리 안갚느냐? 언제 갚을거냐? 라고 물었을 때 한 사람은 고개를 빳빳 세우고 삿대질을 하면서 “갚으면 될것아냐! 누가 떼먹는데?” 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갚지 못하게 된 사정을 말하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했다고 하자. 우리는 누구를 불쌍히 여길까?
바로는 여러 차례의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는데도 고개 빳빳 세우고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했다. 이런 바로의 완악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퍼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기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뜻이다. 우리도 우리를 살찌고 통통한 길냥이보다 바싹 마르고 털도 더러운 길냥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까? 하나님의 자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