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가? 우리는 도살 당할 양처럼 수많은 고난들을 받고 있지만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분을 힘입어서 능히 이기고도 남는다.
이전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재판관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법정에 세우겠는가?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변호사시라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는가?” 라고 질문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면서 그 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는다고 하는 내용이다.
앞부분에서 누가 우리를 고소하거나 정죄하겠느냐? 라고 법정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35-39절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으며 시작한다. 끊는다는 말은 이혼을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남편으로 비유해서 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간구해주시는데 누가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젊은 남녀가 사랑하는데 부모는 반대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모는 자식을 이길 수 없다. 정말로 죽고 못산다고 사랑할 때는 강제로 끊어 놓았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가문이나 학벌이나 어떤 장애물도 방해할 수 없다.
“누가 우리를” 이란 번역은 원어의 어순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리스어에서는 우리말과 달리 동사 다음에 목적어인 우리가 나와야 맞다. 목적어를 동사보다 앞에 둘 때는 특별한 강조의 뜻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34절에서 중심단어는 강조하기 위해 앞에 내어놓은 “우리” 라는 말이다. 바울 당시 본문의 문맥에서 우리라는 말은 좁게 본다면 바울과 바울과 논쟁을 벌이는 대상인 돌아온 유대인들이다. 넓게 본다면 로마교회의 모든 성도들이고 시대를 초월하여 이 말씀을 받는 모두에게 적용한다면 모든 신자들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러있다는 것은 축복을 뜻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영원한 저주를 말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가? 본인과 본인의 아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장인 장모님 처남들이 반대를 했다. 아내의 대전여고 동창인 친구와 교육대학 친구까지 찾아와 반대했다. 본인이가난한 초등학교 교사인데다가 가족들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아내의 사랑에서 본인을 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바울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목록들은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겪는 어려움을 성도들의 입장에서 늘어놓은 것이다. 첫번째 목록인 환난이란 말은 빨래를 쥐어짜듯 쥐여짬을 당한다거나 무거운 것에 억눌림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들이 복음전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억눌림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또 성도들이 복음 전하다가 받는 스트레스를 뜻할 수도 있다.
두번째 목록인 곤고란 말은 원래 좁은 장소란 말이다. 그리스의 데살로니가나 고린도에 가면 바울 당시의 감옥이 남아있는데 땅을 파고 뚜껑을 덮은 것이다. 중세의 고문방법중의 하나도 천장만이 뚫려있는 아주 좁은 지하에 가두는 형벌도 이와 비슷하다고 본다. 이는 바울이 실제로 경험한 것을 기록했을 것이다.
세번째는 박해이다. 이는 종교적인 이유로 핍박을 받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받는 박해를 말한다. 바울 당시엔 주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다. 1세기 후반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로마황제를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사자 굴에 던져지고 훈련 받은 검투사들과 결투를 하게 했다. 예수께서도 이런 박해를 미리 아시고 마태복음 5:10-12절에서 하늘나라가 이런 사람들의 것이라고 축복하셨다.
네번째는 굶주림이다. 1세기 후반 많은 성도들이 잡혀 감옥에 갇히고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음식을 주지 않거나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주었다. 많은 성도들이 굶어 죽거나 잘못된 음식을 먹고 병들어 죽는 것을 선택했다. 다섯번째는 헐벗음인데 벌거벗겨진다는 뜻이다. 이는 완전히 벗겨진다는 뜻이 아니라 옷을 구하지 못해 추위에 떨다가 얼어 죽는 것을 말할 것이다.
여섯번째 위협이란 말은 위험이란 뜻인데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때문에 위험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칼이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때문에 처형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1세기 후반에는 많은 성도들이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칼 하나 받아 들고 훈련 받은 검투사들과 결투해야 했다. 이와 같이 성도가 겪을 7가지의 어려움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을 대표로 늘어놓은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오지 않는 모든 어려움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가 겪을 어떠한 어려움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바울은 36절에서 시편 44:22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은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도살당할 양처럼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사랑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성도들은 위에서 나온 7가지 고난을 통해 죽임을 당하거나 죽음의 위협에 놓여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해 죽으셨고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다는 말이다. 이는 서로 뗄 수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 죽고 못살만큼 사랑하는 사이인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떼어 놓겠느냐는 것이다.
37절에서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긴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란 7가지 고난과 36절의 인용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란 바울 일행과 로마교회 성도들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도 역시 넉넉히 이긴다는 것이다. 누구를 통해서 이기는가?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통해 이긴다는 뜻이다. 그 분이 누구인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 둘 다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바울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이시라는 말도 맞지만 바로 앞에 나오는 34-3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말했기에 문맥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맞다고 본다. 즉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넉넉히 이긴다는 말은 우리의 전투능력으로 이긴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이긴다는 말이다.
넉넉히 이긴다는 말은 완전히 정복하고도 남는다는 말이다. 당시 성도들이 전문적인 검투사들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영적인 싸움에서는 우리는 세상 어떤 상대나 악한세력과 싸워도 아주 여유있게 이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가 우리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복음의 능력으로 어떠한 위협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 동안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주시는 상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다 보상하고도 충분히 남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