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5-8 영광에 대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해 보이셨다.
이전 말씀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누리자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소망을 자랑하면서 환난도 자랑하는데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러한 소망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그 사랑을 증명하신 것이라는 내용이다.
새번역은 같은 단어를 2절에서는 소망이라고 번역하고 4절과 5절에서는 희망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원어에서는 둘 다 똑 같은 단어이다. 새번역은 이 소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번역하고 개역은 소망이 부끄럽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원어는 정관사가 있기에 분명히 그 소망 또는 이 소망이라고 해야 한다. 원어는 이 소망은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2절에서 자랑한다는 말과 정확히 반대가 되는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반대말로 바꾸어 말한 것은 자랑한다는 말과는 다른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 당시 현실 세계에서는 믿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진 몸으로 죽음을 당했다. 당시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을 비롯해 믿는 자들도 항상 부끄러운 죽음의 위협에 놓여 있었다. 바울은 그걸 말하려고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진 채로 죽음 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가진 소망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여기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로마서 1:16절의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앞부분(접두어)만 다른 말이다. 1:16은 epi 라는 말이 앞에 붙어있는데 하고 있는 일이나 이미 한 일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5:5절에는 kata라는 말이 붙어있다. kata가 붙어 있는 이 말은 현실은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강요하고 있지만 소망은 우리를 부끄러움에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편22:5절에 보면 “주님을 믿었으므로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주님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여기서도 결국은 소망 때문에 수치를 당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소망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에게 지금 당하는 수치가 진짜 수치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소망은 절대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을 것이란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소망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이유를 5절 뒷부분에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통하여 부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의 해석은 교부들 사이에서도 다르게 해석되었다. 어거스틴이나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오리겐이다 암브로시아스터나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석했다. 오늘날 대다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원어의 문법상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일 수도 있지만 이는 분명히 우리에게 쏟아 부어 하나님의 사랑이다. 쏟아 붓는 다는 말은 가죽부대에 담긴 포도주를 쏟아서 왈칵왈칵 쏟아내며 잔에 넘치도록 부어주는 모습을 나타내는 그림언어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우리 마음의 잔에 넘치도록 쏟아 부어주셨다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의 가죽 부대안에 담겨 있던 것을 이미 우리 마음의 잔에 완전히 넘치도록 쏟아부어 주셨다는 말이다. 이 놀라운 역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성령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에게는 이 놀라운 축복의 역사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계속 채워지고 있는 주유소의 연료 탱크와도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님이라는 펌프를 통하여 여러분의 마음의 연료탱크 입구까지 가득 채워주시는 것이다. 가득 차서 흘러 넘치도록 쏟아 부어 채워주신 것이다. 그 사랑을 믿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그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흘러 넘치기 때문에 환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고 확신하는 것이다.
원어에서 6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왈칵왈칵 쏟아 부어 주신 당신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딱 맞는 때에 경건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한번 죽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약하다는 말은 육체적 약함보다는 도덕적 나약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행위로 우리 스스로를 의롭게 할 힘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약할 때 딱 맞는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7절도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인지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의인을 위해 죽을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 왜냐하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인과 선한 사람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의인을 위해 죽을 사람은 없지만 선한 사람을 위해 죽을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이 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고 자기 희생적 헌신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원어에 보면 의인에는 관사가 없고 선한 사람에는 관사가 있기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리킨다며 순교자들을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의로운 사람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고 선한 사람이란 남에게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원어에서 “The Good”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맥상 자기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위해 죽는 사람은 아예 없고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위해 죽을 사람도 매우 드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세단계의 점층법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7절의 두 종류의 사람을 위해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8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8절은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하며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다고 했다. 실증이나 확증으로 번역된 말은 원어에서는 함께 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함께 서셔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던 놀라운 사랑을 우리 마음에 쏟아 부어 주신 것이다. 이 사랑을 우리가 이미 다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이 놀라운 사랑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절대로 부끄러워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