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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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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Word

로마서 4:1-3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없던 아브라함

봉인된 두루마리 편지와 로마로 이어진 길 · 로마서 1장

2025. 9. 1. · 안정섭 목사 · 로마서 4장 강해 설교

로마서 4:1-3 그렇다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발견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바울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다며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이라 대답했다.

이전 말씀에서는 그러면 율법은 폐지된 것이냐는 질문에 바울은 아니라며 믿음은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며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철저히 순종해야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자 바울이 성경의 증거를 들어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셨다고 대답하는 내용이다.

원어에서 4:1절은 “그러면 무엇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 아브라함, 우리 조상은?” 이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육신으로” 라는 말이 1절 맨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앞에서 믿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운다고 하자 아브라함의 예를 들며 질문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해야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순종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지 않느냐는 뜻으로 질문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율법을 가장 잘 지켜서 의롭다함을 받은 표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4:1절 맨 끝에 매달려있는 있는 육신으로 라는 말이 어느 말을 꾸미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육신으로 라는 말이 우리 조상이란 말을 꾸민다는 것이다. 유대인 신자의 질문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혈통적 조상인 아브라함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로마서에서 육신으로 라는 말이 사람을 꾸미는 말로 쓰인 경우는 사람 다음에 육신으로 라는 순서로 나온다(롬 1:3; 9:3, 5). 이러한 문법적인 어순으로 보면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라는 해석이 자연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ESV나 NASB는 원어의 어순을 따라 혈통상 우리 조상이라고 번역했다.

또 육신상으로 라는 말이 얻었다 즉 발견했다 라는 말을 꾸민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NKJV, NIV는 이와 같이 번역했다. 육신상으로 무엇을 얻었거나 발견했다라고 하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엇을 얻었느냐는 질문이다. 바울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상의 논쟁은 사본들에서도 발견된다. 4세기 사본인 Codex Sinaitcus나 5세기 사본인 Codex Alexandrinus와 그 밖의 다수의 대문자 사본들과 소문자 사본들이 발견했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4세기 사본인 Codex Vaticanus는 발견하다는 말 삭제했다. 이미 4세기의 성경 해석자들도 육신으로 라는 말이 우리 조상을 꾸미는지 아니면 발견했다는 꾸미는지 해석상 어려움이 있었다는 뜻이다. 발견했다는 말을 삭제하면 육신상으로 라는 말은 명백히 바로 앞에 있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수식하는 말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많은 후기 소문자 사본들과 1516년 인쇄된 공인본문인 Textus Receptus는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발견했다는 말을 육신으로 바로 앞으로 바꾸어 놓았다. 육신상의 우리 조상이 아니라 육신상으로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의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게 바꾸어 놓으면 육신으로 라는 말은 발견했다는 말을 꾸미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발견했다는 말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 앞에 있는 것이 해석상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고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원문인 것은 분명하다.

다수의 오늘날 성경 해석자들은 이 부분에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말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4세기 사본 필사자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성경 필사자들과 오늘날 학자들이 육신으로 라는 말이 발견된다는 말을 꾸미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4:1절은 바울이 로마교회로 돌아온 유대인들과 가상의 대화를 하는 문답형식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교회로 돌아온 유대인 신자의 말이라면 육신으로 우리의 조상이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가상의 로마교회 신자의 질문에 대해 2절에서 바울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바울은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기에 아브라함도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전제 하에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면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하는가? 창12:1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했다. 그런데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자신의 생각에 따라 이집트로 갔다. 거기서 아내를 동생이라 속이다가 큰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창12:1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호해주시고 의롭다 해 주신 것이다. 또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믿지 않고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으려고 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법을 잘 지켜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위로는 자랑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3절에서 창15:6을 인용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고 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는 실수가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고 은혜를 베푸셨을 때 항상 하나님을 믿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은 마치 어린 자녀가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 딸 예슬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교사 시절 본인이 전도한 학부형 가족과 지리산을 가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분들이 죽기전에 지리산 한번 가보고 싶다고 간곡히 길 안내를 부탁을 해서 약속했던 것이다. 전날 밤 예슬이가 밤새 토하면서 열이나고 아팠다. 그래서 등산을 포기하고 함께 가기로 했던 가족에게 안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새벽에 예슬이가 안아프다며 가자고 보채는 것이다. 실제로 열도 내렸고 워낙 어릴 때부터 본인을 따라 따라 산을 많이 다녔기에 데리고 갔다. 지리산 거림골로 들어가 1시간 가량 가자 예슬이가 못가겠다고 주저 앉았다. 이미 본인의 차는 하산지점인 중산리 주차장에 놓았고 출발한 곳에 세워놓은 차의 키를 가진 가족은 앞서서 가버렸다. 어떻게 할 수 없어 본인의 배낭에 있는 것을 아내의 배낭에 구겨넣고 예슬이를 빈 배낭에 넣고 올라갔다.

예슬이는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산에 데리고 다녔기에 산에만 가면 날아다녔다. 걷지 못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업고라도 갈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무작정 따라온 것이다. 예슬이가 본인에게 착한 일을 많이해서 한국에서 제일 큰 산을 업고 올라간 것이 아니다. 그날 새벽 예슬이는 본인에게 안 아프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본인이 딸을 업고 지리산에 오른 이유는 본인의 딸이기 때문이다. 그날 본인은 초등학교 2학년인 예슬이를 배낭에 넣고 세석평전을 거쳐 정상인 천왕봉까지 6시간을 걸었다. 천왕봉 정상에서 만난 어느 미국인은 본인보고 Good Father라고 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바로 이런 믿음이다. 자녀가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듯 하나님을 믿고 무작정 따라 나서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지도 않고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도 않고 거짓말까지 하던 아브라함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아주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책임을 지고 인도하신 것이지 아브라함이 잘해서가아니다. 히브리서 11:8-10에 보면 아브라함은 살던 곳을 떠나 무작정 약속의 땅에 가서 나그네 생활을 했다고 했다.

당시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의 우르는 인구 300,000이었고 주민들의 교육수준은 대단히 높은 곳이었다. 문명이 대단히 발전했던 도시였지만 우상들이 가득한 도시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뉴욕에서 좋은 직장 잡고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네바다 사막에 텐트를 치고 농사짓고 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만 믿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고 확신하고 길을 나선 아브라함이기에 그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하신 것이지 뭘 잘해서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행동에 옮긴 것을 율법이 없던 시절에도 율법을 지켜 경건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물론 그 아들 이삭도 손자 야곱도 가나안 땅을 차지 못했다. 오직 사라를 매장하기 위해 Machpelah 굴이 있던 밭을 샀을 뿐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 아브라함은 의롭다 인정받을만한 일은 아무것도 한 적이 없다. 단지 자녀가 아버지를 따르듯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작정 따라 나섰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속한 것을 자랑했고 개인적인 경건을 자랑했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완성이고 경건의 표본으로 삼는 아브라함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누구도 개인적인 경건이나 특정 교단이 특권을 가진 것처럼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의롭다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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