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25-26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언약궤의 속죄소 위에 세우셔서 과거에 지은 죄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심으로 자기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고 이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하고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전 말씀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실 때 처음 창조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하시는 은혜의 선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셨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도 하나님께서 예수를 속죄소에 세워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차별없이 의롭다고 하신다는 내용이다.
25절에도 차별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이 숨겨져 있다. 25절에서 새번역은 속죄제물이라고 번역하고 개역은 화목제물이라고 번역된 말은 본래 언약궤 위에 두 그룹 사이의 속죄판을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오늘 본문과 히브리서 9:5절에만 나온다. 히브리서 9:5에 보면 새번역은 속죄판이라 번역하고 개역은 속죄소라고 번역했다. 이는 언약궤를 덮던 뚜껑을 말한다. 구약을 보면 이 말은 27번 중 21번이 언약궤의 뚜껑인 속죄소을 가리키는데 썼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은 이 단어 앞에 관사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어번역은 속죄소라고 번역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랜다는 뜻으로 번역했다. 다수는 정관사가 없기에 속죄소라고 번역하기 어렵다며 그를 뿌려지는 장소와 동시에 제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난해하고 혼란스럽다며 속죄하는 제물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단어가 칠십인역 구약성서에서 이 본문처럼 아무런 수식 없이 속죄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 예가 없다며 속죄의 수단 또는 속죄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출애굽기 25:17도 역시 관사가 없다. 아직 언약궤가 존재하지 않을 때 언약궤 위의 속죄소를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로마서3:25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새로운 속죄소를 하나님께서 다시 만드셨기 때문에 관사가 없는 것이다. 또 언약궤를 덮는 속죄소는 지성소 안에 있어 유대인들이 볼 수 없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 어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소는 더 이상 지성소의 신성한 은밀함 속에 보존되어 있지 않고 세상의 소란스러움 한가운데로 옮겨져 적대적이거나 멸시하거나 무관심한 무리들 눈 앞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한다.
또 이부분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쓴 것이기 때문에 저들이 속죄소란 말을 모를 수가 없다. 25절 앞부분을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속죄소에 전시하셨다는 뜻이다. 물론 새로운 속죄소는 하나님과 화해하는 곳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비유이지 실제 장소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의 그림을 보면 바울이 사용한 비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속죄소 위에는 두 그룹이 조각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두 그룹들로 감싸져 있는 곳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운행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곳에 전시하셨다는 말은 두가지를 뜻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뜻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구약의 속죄제를 이해해야 한다. 레위기 16:12–19를 보면 대제사장인 아론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제를 드리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속죄소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전에 한번 속죄일 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언약궤의 덮개에 뿌렸던 것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속죄소 위에는 염소의 피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속죄소에 전시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이 새로운 속죄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또 다른 뜻은 예수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속죄소 두 그룹사이의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시하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소의 두 그룹 사이에 두신 것은 그가 모든 사람들을 대속하기 위한 피흘리신 제물인 동시에 하나님 이신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두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25절 후반부에 나와있는 이제까지 지은 죄들을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너그럽게 보아주신다는 것은 그냥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다. 단지 벌하지 않고 그냥 놔두시는 것이다. 이는 언젠가 때가 되면 처벌하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 처벌하실 것이다. 그때가지 참아주시는 것이다.
두번째는 26절에 나와 있다. 이제 새시대가 왔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소 사이에 두신 것은 우리의 죄를 참아주시고 그 피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소 사이에 전시하셨다는 말은 또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래 속죄소는 지성소에 있어 모두에게 전시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가 백성들을 위해 제사드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속죄소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전시하셨다. 21–22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을 없애셨다면 여기서는 대제사장과 일반인들 사이에 가로 막은 것을 없애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도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이다. 교황이든 대주교든 유명한 목사든 평신도든 다 똑같이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신 새로운 속죄소 앞으로 직접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사는 하나님과 성도들을 연결해주는 매개체가 아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아무 차이가 없다. 단지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