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25-27 할례 받은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무할례가 되고 할례 받지 않은 사람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 사람은 할례 받은 사람이 된다.
이전 말씀에서 바울은 유대인 신자들이 말로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면서 왜 스스로는 지키지 않느냐며 율법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에게 모독을 받는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25절은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 또 다른 한편으로는 …” 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대로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가 하면이라는 뜻이다. 이어서 한편으로는 할례는 유익한 것이다 네가 만일 율법을 행한다면 이라는 말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만일 율법을 범한다면 너의 할례는 무할례가 되는 것이라는 말과 대조가 된다. 5세기의 신학자 Theodoret은 이에 대해 “우리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값비싼 옷을 보관할 때는 봉인을 붙이지만 그 안에 아무 것도 없을 때는 그러한 봉인은 쓸데없는 것이다” 라고 했다. 할례는 하나님께 순종이라는 귀한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봉인과 같은데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면 무할례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26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하며 25절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설명한다. 만약 무할례자가 율법의 요구사항들을 지킨다면 그의 무할례는 할례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킨다는 말은 사도행전 22:20절에서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켰다고 할 때 쓰인 말과 같은 말이다. 바울서신에서 이 말은 주로 주의 말씀을 지키라는 뜻으로 쓰였지만 본래 의미는 말씀을 잘 간직한다는 뜻이다. 잘 간직하면 반드시 지키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할례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25–26절은 마치 수학등식과도 같다. 25절은 “할례 – 순종 = 무할례”라는 뜻이다. 또 26절은 “무할례 + 순종 = 할례”란 뜻이다. 그렇다면 핵심은 할례가 아니라 순종인 것이다. 하나님은 저들에게 계약서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할부금을 성실히 납입할 것을 요구하신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종이 구원의 조건이란 뜻은 아니다. 순종은 구원받은 자에게서 볼 수 있는 증거인 것이다.
어째서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율법과 할례를 자랑하면서도 지키지는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에 대해 거의 미신적인 수준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당시 랍비들의 말에 따르면 할례 받은 사람은 Gehenna에 내려가지 않는다 라고 했다. 이런 미신적인 믿음이 사람들 앞에서만 눈가림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할례란 계약의 당사자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표시이며 만약 순종치 않으면 생식기의 포피가 잘려나가듯 목이 떨어져 나가도 좋다라는 뜻인 것이다. 그렇다면 할례는 부동산 매매계약서와 같은 것이다. 계약에서 중요한 것은 계약서가 아니라 다달이 납입금을 제때에 내는 것이다. 제때에 내지 않으면 그 집을 뺏기고 쫓겨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의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할례는 마치 지불해야 할 잔금이 명시된 계약서 같은 것인데도 마치 지불이 끝난 계약서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할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런 말은 없다. 신명기 6:3에 보면 “이 모든 말을 듣고 성심껏 지키면, 주 당신들 조상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당신들이 잘 되고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
27절에 보면 순종이 계약서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계약서가 없더라도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율법과 할례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이다. 계약서 없는 이방인들이 지키는 것은 율법의 조문들이 아니라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다. 배우지 않아도 성령께서 마음에 기록해 주시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가는 사람이 율법과 할례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생각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레위기 26:41, 신명기 10:1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 신명기 30:6에도 역시 마음에 할례 받게 하신다는 말이 나온다. 유대인 남자들의 육체에 행한 할례는 계약을 계속 되새기게 하려는 것이다. 하루에 몇 차례씩 할례 받은 표시를 보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되새기게 한 것이다. 절대로 자랑하라고 주신 표시가 아니라 스스로 되새기게 하려는 것이었다.
남에게 자랑하게 하려고 주셨다면 얼굴에다 표시하게 하셨을 것이다. 길냥이 중성화 수술 마친 표시로 왼쪽 귀 끝을 조금 자르는 것처럼 자르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자기는 못 보고 남들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식기에 표시를 해주신 것은 남들에게는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할례를 생식기에 하도록 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내놓고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 보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짜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 하지 말고 오직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 할례를 받는 것이 무엇인가? 예레미야 4:1절에 보면 마음에 있는 역겨운 우상들을 버리라고 했다. 또 4절에서는 너희 마음의 포피를 잘라내라고 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덮어 가리고 있는 우상들을 버리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을 가리고 있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버리는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리고 있는 우상들인 권력이나 명예 재물 등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 우리도 로마교회로 돌아온 유대인 신자들처럼 외형적인 거룩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참된 것이 없기에 겉모습만 거룩해지는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교회가 타락했을 때도 외형적인 거룩을 자랑함으로써 그 안에 참된 거룩이 없는 것을 감추려고 했었다. 4-5세기에 살았던 Pelagius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된 할례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을 마음에 간직함으로써 우리 마음을 가리고 있는 헛된 것들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어지는 28–29절에서도 겉모양으로 유대사람이 유대 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으로 유대사람인 이가 진짜 유대사람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도 바울이 전하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마음에 받은 할례가 진짜 할례라는 것이다. 진짜 할례를 받은 사람은 그 마음을 가리고 있던 것들이 벗겨졌으므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 칭찬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