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1-4 앞에서 말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은 바로 그대이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를 지은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고 기다리시는 것은 그대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멸시하고 있다.
이전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은 동성애 뿐 아니라 악한 마음이 가득하여 남을 비방하고 남의 등에 비수를 꽂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지혜가 없어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알면서도 자신들이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라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과 같은 태도로 이방인 신자들을 멸시하는 유대인 신자들을 책망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과 같은 태도로 이방인들을 심판하던 유대인 신자들에게 경고했다. 유대인 신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율법을 근거로 이방인 신자들을 심판했기 때문이다. 원어에서 2:1절은 그러므로 너는 변명할 여지가 없어, 이 사람아!” 라는 말로 시작한다. 유대인 신자들은 1:26-32절에 나오는 동성애에서 시작하여 한없이 나열된 모든 죄들은 이방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수는 바울이 사용한 이러한 기법은 나단이 다윗에게 비유로 말한 방법과 같은 방법이라고 말한다.
1:32절에서 이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사형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도 옳다고 한다고 했다. 이는 분명히 로마교회에 돌아온 유대인 신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도 로마 교회의 유대인 신자들은 다 이방인들의 죄이고 자신들은 해당이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2:1절에서 유대인 신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지 않았다. 원어를 보면 형제라는 말 대신 “이 사람아” 라고 불렀다. 바울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너희들도 변명할 여지가 없어, 이 모든 죄들이 다 남을 율법으로 심판하는 너를 두고 한 말이야, 이 사람아!” 라고 탄식하는 투로 부른 것이다.
왜 이렇게 한심하다는 듯 탄식하며 부르는가? 이어서 바울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유를 설명한다. 왜냐하면 너희들도 그러한 심판을 받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똑 같은 일이란 바로 1:29-31에 나온 죄들이다. 그래서 또 이어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이어가며 심판자인 너도 똑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마교회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법을 따라 본보기를 보이고 그 사랑을 가르쳤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한결 같은 사랑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에 따라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재판관들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2절은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라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라고 했기에 로마교회로 돌아온 유대인들과 바울은 똑 같은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를 따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려진다는 것이다. 새번역은 “공정하게” 라고 번역했지만 원어는 “진리에 근거해서” 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진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그거 다 알잖아! 알면서 왜그래?” 라는 뜻이다.
유대인 신자들이 이점을 알면서도 이방인 신자들을 심판한 이유를 바울은 두가지로 추측해서 질문을 한다. 첫번째 가능성은 3절에 나온다. 3절은 원어에서” 그런데 너는 이렇게 생각하니? 이 사람아!”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어서 바울이 한탄하며 부르는 사람들에게 똑 같은 일을 하면서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너도 똑 같은 일을 하면서?” 라는 뜻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할례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들도 할례 없는 이방인들은 모두 망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원래는 음란한 인간들이기에 작두로 통째로 생식기를 짤라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통째로 자르지 않고 포피만 자르도록 하셨다.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며 구별된 삶을 살라는 뜻이다. 절대로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만약 자랑하라고 주셨다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귀를 잘랐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길냥이들 중성화 수술 한 표시로 왼쪽 귀를 자르는 것처럼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할례는 보이지 않는 생식기에 표시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언약의 당사자만 은밀하게 기억하라는 뜻이지 심판을 피하게 해주는 표시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두번째 가능성은 4절에 나온다. 4절은 “아니면, 네가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아래로 생각하는거냐?” 라는 뜻이다. 인자하심으로 번역한 말은 정직하고 믿을만하고 친절하다는 뜻이다. 너그러우심이나 용납하심으로 번역된 말은 들고 있기 힘든 저들을 높이 들고 있다는 뜻이다. 벌써 내동댕이 쳤어야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참고 높이 들고 계신다는 뜻이다. 오래 참으심이나 길이 참으심으로 번역된 말은 엄청난 분노를 오랫동안 참고 계시는 모습을 뜻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인자하시고 너그럽게 용납하시며 오래 참고 견디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멸망하지 않은 것인데도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너를 회개로 인도하시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으면서” 라고 덧붙인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주신 것이기에 그러한 죄를 짓고도 멸망하지 않은 것인데도 그것도 모르고 자기들이 거룩해서 그런 줄 알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럽게 용납하심과 오랫동안 참으시는 것을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다 알면서도 왜 저들은 자신들의 잘못은 보지 못하면서 이방인 신자들만 죄인으로 몰았을까? 그 이유는 저들이 두가지 자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에게는 엄격한 기준으로 재고 자신에게는 느슨한 기준으로 쟀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두가지 자를 갖고 있다. 남에게는 강철자를 들이대고 자신에게는 고무줄 자를 들이대기 마련이다.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너그러우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며 회개하라고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하나님께서 유대인 신자들을 당장 벌하시지 않는 것은 참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절대로 저들이 거룩해서가 아니다. 저들은 이런 하나님의 자비를 크게 오해하고 있었다. 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고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은 죄를 더 짓도록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은 유대인 신자들도 회개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르고 건방지게 구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멸하는 것이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