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7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서 나타났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의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전 말씀에서는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복음이 선포될 때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먼저 유대인에게 선포되고 그 다음에 헬라인에게도 선포된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말씀은 복음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 근거해서 일어난다는 내용이다.
17절도 역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역시 왜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지 설명한 것이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또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 의롭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의란 구약을 통해 볼 때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나타낸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의로운 일로 해석한다.
이럴 때는 문맥을 통해 해석해야 한다. 17절 첫 부분에서 하나님의 의는 복음 속에 나타난다고 했다. 나타났다는 말은 오랫동안 감추어진 것이 마침내 드러났다는 뜻이다. 신약성경 맨 끝에 나오는 계시록도 이 단어에서 온 것이다. 심판날의 비밀이 이제 드러난 것이다. 구약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마침내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뜻이다. 구약에 숨겨진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을 오래 참아주시고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용서하시며 참아주시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그분이 선포하신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뜻이다. 구약에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히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의롭다는 말은 언약과 관련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옛 언약을 맺으시고 그 자손들에게 확정하신 것이 구약성경에 나온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러한 옛언약은 새 언약의 암시이고 모형이다. 새언약은 십자가에서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고 맺으신 언약이다. 그렇다면 감추어지고 암시되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 분을 믿는 자들 반드시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마지막 날에 절대로 부끄러움 당할 수 없는 것이다.
4세기 말에 활동하던 Ambrosiaster라는 교부도 역시 “의는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약속한 것이 무엇이든 그가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의란 뜻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한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영광을 분명히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뜻이다.
새번역에는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난다고 번역했다. 이부분을 개역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고 번역했다. 원어를 직역한다면 “믿음으로부터 믿음에까지” 이다. 개역은 마치 믿음을 수단으로 믿음에 도달한다는 말처럼 이해되기 쉽도록 번역되어 있다. 실제로 번역자들은 믿음을 수단으로 믿음에 도착한다고 생각하고 번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원래 믿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에 도착하기까지 라는 뜻이다. 다수는 이 말을 오로지 믿음으로만 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래서 새번역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라고 의미를 살려 번역한 것이다.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기까지 라는 말은 처음 믿는 순간부터 믿음이 완성되는 순간까지의 전과정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 새번역처럼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즉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처음 믿을 때부터 믿음이 완성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이라고 하면 논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타당해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교리보다 먼저 바울 당시의 로마 교회 상황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당시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유를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믿음이라는 해석이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돌아온 유대인들은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은 믿음이외에 율법이나 다른 것을 더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전부이니 절대로 다른 것을 추가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말은 하박국 2:4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기록된 것과 같이” 라는 말은 성경을 인용하여 앞에서 말한 것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때 쓰는 말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것이다”에서 믿음으로 라는 말을 앞에 나온 의인에 붙여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뒤에 나오는 “살것이다”에 붙여 해석해야 하는지는 논란이 있다. 어떤 신학자나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을 무조건 쫓아가는 것보다는 전후 문맥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앞뒤를 잘 읽어보면 누구나 답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산다는 말은 16절에 나온 구원이라는 말과 연관을 지어 생각해야 한다. 구원이란 멸망으로부터 건짐 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을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게 되는 것이 구원이다. 17절 앞부분에서는 이 구원의 복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은 율법이 아닌 오로지 믿음으로만 드러난다는 것이다. 또 하박국 2:4를 인용한 것도 율법으로는 죽을 수 밖에 없었지만 믿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려는 것이다.
이어지는 18절의 문맥을 보아도 믿음으로만 살 수 있다는 것이 맞다. 18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는 진리를 가로막고 믿지 않는 자들은 죽게 된다는 것이다. 17절은 믿음으로 살게 된 사람들을 말하고 있지만 18절은 믿지 않아 죽게 된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후 문맥으로 보면 우리는 오직 믿음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율법도 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믿음으로 우리가 살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살리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