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6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복음이 선포될 때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먼저 유대인에게 선포되고 그 다음에 헬라인에게도 선포된다고 말한다.
이전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복음 전하려는 열정적인 마음을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도 전하길 원한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16절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원문에는 16절 맨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앞에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께 빚을 진 것을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갚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족 모든 계층 사람들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면서 갑자기 진 빚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빚을 졌을 때 부끄러움을 당하는 경우는 빚을 갚지 못할 경우이다. 그런데 바울은 빚진 자라고 말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기에 자신은 빚을 졌지만 갚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일 수 있다. 이를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부끄러움이란 잘못된 짐작에 따라 말하거나 잘못된 확신에 따라 행동한 결과를 말한다.
시편 35:26절에 보면 시편 기록자인 다윗은 “나의 불행을 기뻐하는 저 사람들은 다 함께 수치를 당하고 창피를 당하고 말 것이다” 라고 했다. 다윗이 당한 불행을 보고 이제 다윗은 끝났다 라고 생각하고 기뻐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다윗은 다시 영광의 자리로 회복되었기에 잘못 판단하고 다윗을 조롱한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한 것이다.
예수께서 5000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도 살리실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제자들도 예수께서 위대한 이스라엘을 세울 메시야인줄 알고 따라다녔다. 예수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마가복음 8:31에서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예고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꾸짖으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이런 베드로에게 8:38에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라라” 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신의 가르침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분명히 당부했는데도 제자들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받기 전에는 부끄러워 했다.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잘못된 확신을 가졌기에 세상의 왕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바울도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는 실패자이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로 다 죽여야 할 자로 여겼다. 바울도 그대로 계속 나갔으면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자신이 핍박하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것이다. 바울은 과거에 자신이 잘못된 신념을 가졌던 것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만나기 전 귀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부끄러워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벌거벗겨진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증거하고 그분의 말을 전하는 것을 매우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수치스럽게 죽은 예수는 이제 끝이 났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했다. 바울이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깨닫고 나서 보니 과거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에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한 것이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단순히 자랑스럽다는 말을 부정어로 표현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바꾸면 당시 주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부끄러워하도록 강요하던 압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부끄럽지 않다는 말과 자랑스럽다는 말은 의미가 다른 말이다.
바울이 부끄러워 하지 않게 된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장차 주님 오실 때 영광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했기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복음 전한다해도 같은 상황은 벌어진다.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조롱하고 비웃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우리가 복음을 부끄럽게 여겨 전하지 않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한때 이 땅에서 살다 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도 역시 장차 주님과 함께 받을 영광을 바라보며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그분께서 모든 족속에게 전해주라고 맡기신 복음 전하는 일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16절 뒷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복음이 유대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모든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에 대해 해석이 엇갈린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이란 구원의 근원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복음이 선포될 때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럴 때는 16절 자체의 구조를 먼저 보고 전후 문맥을 본 뒤 다른 바울의 편지들에서 같은 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16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면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 선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복음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16절 자체의 구조로 보면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근원이라기 보다는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옳다. 또 이어지는 17절에 보면 믿음으로 이러한 역사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렇기에 복음을 듣고 믿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8절에서도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18절에서는 복음이라는 말 대신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바꾼 것만 다르다. 그렇기에 복음은 결국 십자가의 말씀인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은 어리석은 것이고 아무 능력도 없는 부끄러운 것이다. 하지만 구원받을 사람들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서 1:16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복음이 선포될 때 역사하시는 능력이다. 복음 전하는 자가 잘 전해서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기도 하고 복음 전하는 자가 잘못 전해서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든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사람을 먼저 말한 것은 바울의 선교전략을 나타낸다. 바울은 주로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유대인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 사람이란 말은 종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 즉 모든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또 유대인 회당에 출석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을 그 다음에 말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는 대사로 소개하고 있다. 바울서신에서 보면 바울은 자신이 소개하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두가지 뜻으로 표현한다. 첫째, 고린도전서 2:4-3:10 에서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표현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2:4-3:10절에 비추어 보아도 하나님의 능력이란 복음이 선포될 때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는 의미이다.
둘째,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또한 부활의 능력이다. 고린도전서 6:14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님을 살리셨으니 그의 권능으로 우리도 살리실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장차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 영광의 몸을 입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이처럼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장차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은 결국 부활의 소망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4:7에 보면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다며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 능력은 우리가 질적으로 다른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의 놀라운 변화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능력에서 오는 것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 그 소망이 우리를 변화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