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7:1-5 바울 일행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데 데살로니가 출신 아리스다고도 함께 동행했고 호송하던 백부장은 바울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에 시돈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오도록 허락했다. 항해는 역풍을 만나 해안선을 따라 매우 힘들게 항해하여 루기아 지방의 무라에 이르렀다.
이전 말씀에서는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가 바울이 무죄라고 했고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더라면 석방할 수 있었겠다고 베스도에게 말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기로 결정하고 배를 타고 루기아에 있는 무라까지 가는 여정이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로마까지 항해하는 여정은 전문적인 선원들이 기록한 형태가 아니다. 19세기를 살았던 숙련된 요트 조종사였고 고전학자였던 Smith는 누가의 기록의 정확성과 정직성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항해하면서 경험한 것을 관찰한 것이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도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여행은 역사적으로 정확 또는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고대 전문가나 오늘날 전문가에게도 다 인정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록들은 역사적으로도 분명히 증명되는 것들이다.
1절은 다시 우리라는 말로 시작된다. 우리 라는 표현은 21:18절에서 나왔고 그 뒤 사라졌다가 여기서 다시 나타났다. 우리라는 표현이 바울 일행이 아닌 그 배에 타고 가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말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는 바울과 함께 항해하는 우리라는 말을 다른 죄수들과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있는 것이기에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 자신이 포함된 것이다. 어떻게 죄수가 아닌 사람이 죄수와 함께 배를 타고 가느냐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 배는 로마군의 배가 아니고 개인 소유의 배이기에 누구나 삯을 내면 탈 수 있는 것이다. 그 배 안에는 그 밖에도 개인적인 목적으로 항해하던 많은 사람들이 탔을 것이다. 대부분은 우리라는 말은 바울과 동행한 사람들이고 누가 자신이 포함되었음을 나타내는 말로 본다. 누가는 바울 뿐만 아니라 바울과 동행하던 자신의 관점에서 쓰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로 항해하도록 결정이 났을때 그들은 바울과 다른 죄수들 몇 사람을 황제부대의 백부장 율리우스에게 넘겼다고 했다. 항해한다는 말은 멀리 배를 타고 간다는 뜻이다. 다른 죄수들이란 사형수들이다. 로마의 경기장에서 사자나 검투사들과 싸워 죽음으로 관객들을 즐겁게할 사람인데 지방정부에 끊임없이 요구한것에 따라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로마시민으로 황제에게 재판을 받으러가는 신분이었다. 바울은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한 로마 시민으로서 다른 죄수들과는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취급되었을 것이라다. 바울은 사형수의 신분이아니라 황제를 직접 만나 황제의 판결을 받으러 가는 존귀한 로마 시민이었기에 배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했고 모든 선원들에게 존중을 받았을 것이다.
2절은 그래서 아드라뭇데노 배에 올랐다고 했다. 아드라뭇데노란 무시아에 있는 에게해의 항구 이름이다. 이는 배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 곳에서 온 배라는 뜻일 것이다. 그 배는 아시아의 여러 곳을 가려는 배라 했다. 당시 배들 대부분이 가이사랴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고 해안선을 끌어안고 항해했다. 오직 곡물을 실어 나르는 가장 큰 배들만이 지중해의 넓은 바다로 항해했다. 따라서 바울 일행이 처음 탔던 배는 비교적 작은 배로 해안선을 따라 운항하던 배였을 것이다.
바울 일행이 배에 올라 바다로 나갈 때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했다고 했다. 아리스다고는 누구인가? 아리스다고는 20:4절에서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이다. 골로새서 4:10절에서는 함께 죄수된 자라고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죄수가 아니었다. 바울과 함께 감옥에 있으면서 바울을 돕던 사람이기에 바울은 함께 죄수된 자라고 한 것이다. 단순히 바울을 돕던 사람이 아니다. 빌레몬 24절에는 동역자라고 했기 때문이다. 바울과 함께 사역을 하던 동역자이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시중을 들어주던 사람이다. 바울을 도우며 함께 동역하기 위해 그 위험한 뱃길에도 함께 한 믿음의 동료였다.
2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Philostratus의 글에 보면 Apollonius의 제자들은 죽음의 위협을 앞두고 34명에서 8명으로 줄었다고 했다. 그러한 경향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좋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따라다니지만 죽게 되면 함께 하는 사람이 적은 법이다. 그러나 바울의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했던 것이다. 아리스다고도 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동행하며 바울과 함께 사역을 했던 바울의 진정한 친구 중 하나였다. 나에게는 왜 이런 동역자가 없냐고 하지 말라. 우리가 바로 그런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3절은 이튿날 시돈에 배를 대었다고 했다. 바울을 로마까지 호송할 책임을 지고 있던 백부장 율리우스는 바울을 친절히 대해서 바울이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을 받도록 허락을 했다. 친구들이란 바울이 전에 전도했던 믿음의 형제들이다. 로마까지 호송할 죄수를 이렇게 풀어주는 것은 대단한 신뢰이다. 형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소를 당해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을 이렇게 풀어주는 것은 율리우스가 사람이 좋아서가 절대로 아니다. 이는 바울이 율리우스에게 얼마나 친절히 대했고 얼마나 큰 신뢰를 얻었는지 알려주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바울과 같은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배가 시돈에 정박해 있는 동안 바울은 믿음의 형제들과 귀한 교제를 나누었을 것이다.
4절은 시돈에서 다시 배를 멀리 떠나 보냈다 했다. 맞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했다고 했다. 이는 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서풍이 불어왔기 때문에 구브로 섬의 북쪽 그늘을 바람막이로 사용해서 해안선을 따라 항해했다는 뜻이다(Stott, BST, 387). 해안선을 의지하고 항해했다는 말은 아래로 배를 운항했다는 뜻이다. 구부로 섬의 그늘 아래로 가까이 지나갔다는 뜻이다. 섬의 북쪽해안선이 깊은 바다였기에 그 그늘 아래로 항해했다고 한 것이다. 엔진이 없이 돛과 노로만 항해하던 시절이었기에 얼마나 힘들게 항해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5절은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에 속한 무라에 이르렀다고 했다. 역시 계속해서 해안선을 끌어안고 해안선을 따라 항해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항해했다는 말은 구브로 섬 아래의 그늘을 따라 항해했다는 뜻인 4절과는 달리 가로질러 항해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브로 섬보다는 좀 멀리 떨어져 항해한 것이다.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해안은 육지이기에 구브로섬처럼 가까이에서 항해한 것은 아니다. Western 사본들에는 거기까지 15일이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까지 여정은 정말 힘든 여정이었다.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다.
오늘 말씀에서 돋보이는 것은 바울이 불신자인 백부장 율리우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은 것이다. 이는 율리우스가 친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이 모든 이들에게 큰 신뢰를 받도록 행동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불신자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도록 행동해야 하고 절대로 욕을 먹으면 안된다. 또 돋보이는 사람은 바울과 동행하던 아리스다고이다. 그는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 있는 항해에서 바울을 돕기 위해 자원해서 동행한 사람이고 로마에서도 자원해서 바울과 함께 죄수가 된 사람이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불신자들에게도 삶에서 본을 보여야 하고 복음 전하는 일을 돕는 일에 온 힘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