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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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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Word

사도행전 25:23-27

아그립바 왕에게 물은 베스도

바람을 받아 바다를 건너는 배 · 사도행전 2장 · 27장

2025. 6. 17. · 안정섭 목사 · 사도행전 25장 강해 설교

사도행전 25:23-27 베스도는 바울을 아그립바 왕 앞에 세우고 유대사람들은 죽여야 한다고 청원했지만 베스도 자신은 죄가 없다고 판단하였고 황제에게 상소했기에 황제에게 보내려 한다며 확실한 죄목을 얻기 위해 아그립바 왕 앞에 세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전 말씀에서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자신은 공정한 법의 수호자임을 드러내며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으려는지 물었는데 바울이 황제에게 호소했기에 가두어 두었다고 말했다. 아그립바는 호기심에 이끌려 바울의 말을 듣고 싶어한다고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베스도가 바울을 아그립바 왕 앞에 세우고 유대사람들은 죽여야 한다고 청원했지만 베스도 자신은 죄가 없다고 판단하였고 황제에게 상소했기에 황제에게 보내려 한다며 확실한 죄목을 얻기 위해 아그립바 왕 앞에 세운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이다.

23절도 그러므로 라는 말로 앞부분과 연결이 된다. 베스도가 내일 듣자고 했으므로 라는 뜻이다. 그 다음날이 되어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엄을 갖추고 들어왔다고 했다. 위엄이라는 말은 원어에서 환타지아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아름답게 꾸민다는 뜻이다. 거기에 많이 라는 형용사가 함께 있다. 따라서 위엄이라기 보다는 많이 아름답게 꾸몄다는 뜻이다. 크게 위엄을 갖추었다는 말은 자주색 예복에 금으로 된 머리띠 모양의 왕관을 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베스도 역시 국가행사 때 통치자가 입는 주홍색 예복을 입었을 것이다. 이들은 세상의 영광과 권위를 나타내는 옷차림으로 자신들을 높이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발 아래에 두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화려하게 꾸미고 나선 것이다. 이는 남을 낮추고 자신들은 높이려는 자기 사랑의 기술이다.

개역개정은 이어서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접견장소에 들어왔다고 했다. 개역은 신문소라 번역했고 새번역은 신문 장소라 번역했다. 그러나 신문소나 신문 장소나 접견장소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높은 곳이라는 뜻이다. 강당이라는 말이 헤롯의 궁 안에 있는 장소로 많은 사람이 듣는 장소이거나 강의실 같은 곳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강당이 때로는 공개적인 재판을 위한 장소로 쓰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는 재판정이 아니라며 재판 과정의 신문이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듣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재판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갈 때는 전후 문맥을 통해서 판단해야 한다.

이들은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것을 입고 넓은 강당의 높은 장소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천부장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도 함께 높은 장소에 들어왔다. 이는 마치 대학교의 졸업식 때 교수들이 박사 가운을 입고 입장하여 높은 곳에 자리잡고 앉는 모습과도 같다. 모두가 헛된 세상 영광으로 자신들 스스로를 한껏 높이고 있는 장면이다. 이와는 달리 허름한 옷을 입고 키도 작은 볼품없는 바울이 군인들에 이끌려 들어오는 장면은 이들과 대조된다.

그러나 26장에 나오는 바울의 메시지는 이러한 헛된 세상 영광이 아닌 하늘의 영광을 갖춘 장엄한 위엄을 보여준다. 누가의 이러한 장엄한 의식 안에서 유머가 담겨있다. 누가는 계속 이어지는 문맥을 통해 이러한 헛된 세상 영광을 자랑하는 모습은 바울과 같이 믿는 자들의 관점에서는 한편의 코메디인 것이다. 누가는 겉모습은 초라하지만 하늘 영광을 드러내는 장엄한 연설을 이들과 대조하며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일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24절에서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과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이여 라고 부르며 말한다. 이는 고대 로마인들이 원로원이나 중요한 회의 석상에서 연설을 할 때 시작하는 말의 형식이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자신에게 청원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청원했는가 하면 더 이상 살려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소리쳤다는 것이다. 여기서 뿐만 아니라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도 똑같이 그렇게 외쳤다는 것이다.

25절은 그러나 라는 말로 24절과 대조된다. 모두가 다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외쳤으나 자신이 볼 때는 죽일 죄를 범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역시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친 모든 유대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공정한 법의 집행자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다. 죄가 없으면 풀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호소하였기에 할 수 없이 그렇게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바울도 비난한 것이다. 가만히 있었으면 공정한 법의 집행자인 자신이 풀어주었을텐데 바울이 황제에게 호소했기에 바울을 황제에게 보낼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은 공정하게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바울이 이 일을 다 망쳐놓았다는 것이다. 역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거짓말이다.

26절은 이 일에 관해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죄에 대해 황제에게 보고서로 써 보낼 확실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확실하다는 말은 넘어진다는 말에 부정을 뜻하는 말을 붙여서 만든 말이다. 올림픽 게임의 레슬링에서 넘어뜨리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데 부정어가 붙어 있기에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 다는 뜻이다. 누가 흔들어도 넘어지지 않는 분명한 보고서를 써야 황제에게 좋게 보일 것이라는 뜻이다. Stott는 써 보낼 죄목은 베스도가 분명히 알지만 그것은 로마법에 죄가 아니기에 무죄선포를 했어야 옳다고 말한다(Stott, 369). 베스도의 고민은 풀어주자니 유대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출세에 지장이 있는 것이다. 또 반대로 황제에게 보내자니 마땅한 죄목이 없어 황제에게 문책을 받게 생긴 것이다.

바울이 황제에게 호소했기에 아그립바는 바울을 재판할 재판권이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문맥을 따라 해석하면 이는 공식적인 재판도 아니다. 베스도는 단지 유대인이면서 로마의 황실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아그립바라면 뭔가 멋진 생각이 있을듯도 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그립바가 유대교에 대해서도 잘 알고 또 로마 법에 대해서도 잘 알기에 물은 것이라고 했다. 아그립바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도 인정을 받던 황제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황제에게 잘 보일 수 있는 뭔가 특별한 조언이 있으면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네로가 황제가 되었을 때라고 해도 아그립바 왕은 로마 황실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베스도는 뭐라고 쓰면 유대인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황제에게 잘 보여서 자신이 승진하게 될까 라고 아그립바 왕에게 묻는 것이다. 베스도 역시 벨릭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의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말한다. 베스도는 어떻게 하면 유대인들에게도 인정받고 황제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아그립바에게 좋은 생각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27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아그립바를 설득하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죄목도 밝히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자신에게 멋진 생각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정의를 실현할까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로마 황제와 유대교 지도자들 모두에게 잘 보일지 좋은 생각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것이다. 이처럼 베스도는 자기 사랑을 위해 줄타기를 하던 선수였다. 베스도는 자기 사랑에 있어 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다.

오늘 말씀에 나온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나 로마총독 베스도는 모두 자신을 높이던 자기 사랑의 달인들이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아그립바 2세도 로마황제 클라우디우스에게 잘 보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 수 있다. 아그립바 2세는 그렇게 로마황제에게 잘 보여서 왕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그립바는 자기 사랑의 달인이었다. 버니게 역시 어떤 남자 편에 줄을 서야 자신을 높일 수 있을지 끊임없이 저울질을 했던 사람으로 자기 사랑의 달인이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반면 교사로 삼아야 할 사람은 베스도이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에게 좋은 정보를 얻으려고 전임자 벨릭스의 직무유기를 드러내어 낮추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어리석음과 무능함을 드러내면서 자신은 모든 일을 꿰뚫어 보는 지혜로운 사람임을 드러냈다. 죄수인 바울에게도 사려깊게 배려했다고 말하며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했기에 할 수 없이 보낸다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아그립바는 높여주었다. 아그립바가 로마 황실에 든든한 인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스도는 필요없는 사람들은 밟아서 낮추면서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높여준 사람이었다. 아그립바가 유대교와 로마황실 모두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아그립바를 통해서 황제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아그립바는 자기 사랑에 있어 대인관계로 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다.

아그립바와 버니게나 베스도 모두 똑같이 세상 영광을 나타내는 옷차림으로 자신들을 높임으로 다른 사람들을 상대적으로 낮추었던 사람들이다. 반대로 권력을 가진 높은 사람들에게는 잘 보여서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 사랑에 빠진 멸망할 사람들의 본보기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외치던 사람이다. 로마시민임을 미리 밝혔더라면 이런 힘든 상황에서 미리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아무런 볼품도 없이 죄수의 신분으로 끌려 나온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사람들의 본보기였다.

오늘날 하나님과 이웃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최고급 명품 차들을 타고 다닌다. 이들은 온갖 명품들로 몸을 감싸고 또 메고도 다닌다. 이들은 또한 무거운 돌멩이를 손가락에 매달고 다니며 자랑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자기 사랑을 나타내는 행동들이다. 겉모습을 통해 자신을 높이고 이웃은 낮추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대신 자기를 사랑하여 자기를 높이려는 기본적인 기술들이다.

오늘날 하나님과 이웃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에는 큰 돈도 척척 내놓지만 이름이 전혀 드러나지 않으면 돈을 내놓지 않는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헌금이나 이름없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이름이 드러나고 자신들이 높아지는데만 돈을 내놓는다. 이는 자신들의 명예를 높이려는 것으로 앞에서 말한 기본적 기술에서 한걸음 진보된 형태이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높이는 것은 같다.

오늘날 하나님과 이웃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한다. 세상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들에게 줄을 서서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그들에게 사랑한다는 여러가지 신호를 보낸다. 이런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린도전서 13:7절의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라는 말씀을 암송하고 아멘을 외친다. 그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처세술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한없이 무시하고 밟아버린다. 이런 처세술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대신 자기를 사랑하여 자기를 높이려는 고급 기술이다.

오늘날 하나님과 이웃 대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제공하는 척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은근히 깎아 내리고 교묘하게 자신을 높여 놓는다.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척 하지만 사실 남의 흉을 보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대신 자기를 사랑하여 자기를 높이려는 최고급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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