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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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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wn Word

사도행전 20:7-12

큰 위로를 받은 드로아 성도들

2025. 4. 18. · 안정섭 목사 · 사도행전 20장 강해 설교

사도행전 20:7-12 바울은 드로아를 떠나기 전 밤이 깊도록 강론을 하는 중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 죽었다. 바울이 그 청년 위에 엎드렸을 때 성령께서 아이를 살려주셨고 모인 사람들은 이 청년으로 인해 큰 위로를 받았다.

이전 말씀에서 바울이 유대인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로 돌아갈 때 바울이 세운 각 지역의 교회 대표들과 함께 동행했는데 유대인들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이들을 먼저 가게 했고 바울 일행은 역풍 때문에 닷새 걸려 드로아에 도착하여 일주일간 함께 지냈다. 이어지는 말씀은 드로아에서 밤이 깊도록 강론을 하는 중에 유두고 라는 청년이 떨어져 죽었는데 바울이 살린 내용이다.

7-12절은 드로아에서 일어난 일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7절은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는 빵을 떼려고 모였다고 했다. 주간의 첫날이란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난 다음 날이다. 로마식으로 계산한다면 해 뜰 때부터 하루가 시작되기에 일요일 저녁에 모였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유대식으로 계산한다면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 해질 때 시작해서 토요일 저녁 해질 때 끝이 난다. 그렇다면 이는 토요일 밤에 모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수는 로마식으로 계산하여 일요일 저녁일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AD 57년 4월 24일 일요일 일 것이라며 이 여행자들에게 드로아에서 온전히 하루를 보낸 마지막 날이라고 말한다. 다수는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로마식 시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발견되기에 일요일이라고 주장한다. 누가가 사도행전 2:15절과 3:10절에서 로마식 시간을 사용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누가의 경우 절기는 유대식으로 계산해고 시간은 로마 시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식으로 계산했을 것이라며 토요일 저녁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누가는 분명히 로마식 시간을 사용했다.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유대인들의 관습이기에 누가도 안식일은 금요일 밤에 시작해서 토요일 밤에 끝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가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토요일 저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날 배를 타고 떠나야 했기에 일분 일초가 아까웠다. 그래서 자정까지 계속 강론했다. 강론했다는 말은 설교라기 보다는 서로 대화라는 것이기에 대화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강해한 것이다. 이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환난에도 견디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으로 격려를 한 것이다. 계속했다는 말은 계속 연장했다는 뜻이다. 본래 계획은 짧게 2-3시간 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에 좀 더 가르쳐 주려고 계속 연장해서 전하다 보니 자정까지 전하게 된 것이다. 계속 연장했다는 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던 바울의 이러한 간절한 마음을 알 수 있다.

8절은 그런데 라는 말로 시작한다. 특별한 반전이 일어난다는 암시이다. 우리가 모인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고 했다. 올리브 기름으로 불을 켜던 등불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위층이 상당히 넓은 공간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모두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나서 피곤한 상태에서 모였을 것이다.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뜻이다. 모두가 일을 마치고 피곤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도 알 수 있다.

게다가많은사람들의땀냄새가등불의기름타는냄새와뒤섞였을것이다. 이러한냄새뿐만아니다. 많은사람들이내쉰이산화탄소와등불이타면서생산한냄새없는이산화탄소도뒤섞여그방의공기는정말답답했을것이다. 이처럼피곤한데다가식사후식곤증과함께산소부족현상은졸음을유도했을것이다.

이러한 답답한 공기와 수많은 등불들 사이에 빽빽히 앉은 사람들을 상상하면서 9절을 읽어야 한다. 9절에는 유두고 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었다. 이 청년은 하루 종일 일을 하다 온 노예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말 피곤해서 바깥 공기를 쐬려고 창가에 걸터 앉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그 창가에 걸터 앉은 채 깊은 잠에 빠졌다고 했다. 여기서 깊은 잠에 빠졌다는 말은 깊은 잠에 빠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계속 끄덕거리며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강론의 양이 정말 많았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라는 말도 잠에 빠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기에 이제 이미 깊은 잠에 빠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삼층으로부터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일으켜보니 이미 죽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의사였다. 누가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분명히 직접 확인했을 것이다. 죽었나 보려고 일으켰다고 번역한 것은 잘못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0절은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렸다. 이는 열왕기상 17:21절에서 엘리야가 죽은 과부의 아들 위에 엎드리는 장면과 비슷하다. 열왕기하 4:24절에서 엘리사가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 위에 엎드리는 장면과도 비슷하다. 구약성경에 비추어 볼 때도 바울이 내려가서 유두고 위에 엎드리는 모습은 분명히 죽은 아이를 살리는 모습이다. 바울이 유두고 위에 엎드렸다가 안고 하는 말은 떠들지 말라는 것이다. 아이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바울이 유두고를 안았을 때 성령께서 살려주신 것이다.

유두고가 살아난 후 바울은 다시 위층에 올라가 떡을 떼고 먹었다. 이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떼고 나누어 먹던 것을 기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주의 만찬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제자들 앞에서 빵을 쪼개어 주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하시고는 함께 식사를 했던 것이다. 밤 12시가 넘었기에 집 주인은 모인 형제들에게 음식을 제공했기에 단순히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빵만 쪼개서 함께 먹은 것이 아니다. 날이 밝기까지 이야기를 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야기 하는 것은 단순히 잡담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2절에서 많은 말로 위로했다는 말과 같은 말을 말만 바꾸어서 쓴 것이다. 7절과 9절에서 대화식으로 강론했다는 것을 말만 바꾸어 쓴 것이다. 물론 앞에서 강론한 것 보다는 다소 편안한 분위기에서 질문하고 대답을 했을 것이다. 음식을 먹는 다는 말과 대화한다는 말이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유두고가 죽었다가 살아나자 그동안 바울이 가르쳤던 성도의 부활에 대해 질문한 사람이 있었지도 모른다. 바울은 그에 대해 강론하고 그 밖에 그들에게 위로가 될 말씀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날이 밝자 바울은 배를 타기 위해 떠났다.

12절에서 남아있던 사람들은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이는 집으로 데려간 것이 아니고 밤새 강론을 들었던 위층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유두고가 살아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누워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유두고가 회복되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적지 않은 위로가 된 것은 자신들이 어떠한 핍박을 받거나 심지어는 복음 전하다가 죽더라도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유두고가 살아난 것은 부활이라기 보다는 소생이다. 유두고는 분명 나중에 다시 죽었다.

9절에서는 유두고를 청년이라고 했는데 12절에서는 아이라고 했다. 아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파이다(paida)"이다. 이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9-14세의 소년을 뜻한다. 어떤 이들은 14-18세의 청소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상당수의 학자들은 유두고가 소년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유두고가 소년이었다면 유두고가 죽었다는 말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일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밤에 모이는 것을 정치적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보고 금지시켰다. 특별히 바울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플리니가 밤에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이후에 기독교인들은 밤에 모이는 것을 그만 두었다.

당시 밤에 모이는 것은 또한 비밀스러운 사교의 모임으로 간주되었고 어린 아이를 제물로 드리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에 기독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린 소년이 죽었다는 것은 이러한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었기에 바울이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라는 말은 또한 젊은 노예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이 노예라는 뜻으로 쓰였다면 30세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이해하기 어려울 때는 문맥을 봐야 한다. 유두고는 하루 종일 노동으로 지쳐서 졸다 떨어졌을 것이기에 아이라기 보다는 청년 노예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상당 수도 유두고와 같은 노예였을 것이다.

오늘 말씀에 나온 사람들은 유두고로 인해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유두고가 살아난 기적 때문에 적지 않은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유두고를 살리신 것을 통해서 장차 부활에 대한 말씀을 배웠고 그 말씀에 대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8절에서는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고 했다. 이러한 말이란 4:13-17에 나온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 남은 자들도 구름 속으로 들림 받아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고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고 한 말이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예수를 믿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란 바로 말씀을 듣고 깨닫고 보니 죽어도 좋다 라는 것이다. 부활의 소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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