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5:1-3 할례를 주장하던 유대에서 온 사람들과 바울과 바나바와 심각한 논쟁이 생겼기에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몇몇 성도들을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을 찾아가게 했다. 그들은 가면서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지나며 이방인들이 회개한 일을 전하여 그곳 성도들을 기쁘게 했다.
이전 말씀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교회를 소집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일을 보고하고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어 알아보게 하는 장면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돌아와 선교 보고를 하고 오랫동안 그곳에서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1절을 보면 이 평화가 깨졌다.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내려왔다는 말은 유대와 예루살렘은 높은 산지에 있는 반면 안디옥은 해변에 가까운 곳이고 해발 고도가 낮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분명히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안디옥 교회 구성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200 마일이 넘는 거리를 걸어온 것이다. 이들은 이방인들이 할례도 받지 않고 유대인 성도들과 함께 교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방인 선교 문제는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을 때 이미 결정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다. 두 사람이 기도했을 때 그들이 성령 받음으로 이미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것이다. 또 베드로가 고넬료 가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도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이미 확인해 주셨다. 베드로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예루살렘 성도에게 자신이 경험한 것을 증거했고 자신들과 똑같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모두가 인정했었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인정한 사실을 왜 갑자기 다시 논쟁거리로 삼는가?
사마리아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는 직접 접촉하지 않았기에 상관이 없었다. 고넬료도 역시 이방인 지역인 가이사랴 빌립보에 주둔한 로마군 장교였기에 직접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이 문제가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었기에 베드로와 요한의 증언을 듣고는 옳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는 또한 예수님 명령이기에 원칙적으로 옳다고 인정하고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있던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이 출석하여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교제하게 되자 심각한 문제로 삼은 것이다. 이는 마치 발달 장애아를 위한 특수학교를 세우거나 정신병원을 세운다고 했을 때 좋은 일이라며 모두가 찬성하지만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온다면 반대하는 것과도 같다. 이를 NIMBY 현상이라고 한다. Not In My Backyard를 줄인 말이다. 좋은 일이라고 박수를 쳐 주지만 우리집 뒷마당에는 안된다는 뜻이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기독교인들도 원칙적으로는 옳다고 찬성하지만 실제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로 들어온다고 했을 때는 안된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쉽게 당시 율법을 지키려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비난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구별하는 경계선으로 사용했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율법에 열심인 다수의 유대인 성도들은 자신들이 유대교의 마지막으로 남은 의로운 자라고 생각했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을 같은 형제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지만 다수의 성도들은 이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남은 의로운 자들인 자신들이 이방인들과 섞인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 생각에 옳은 신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먼 거리를 온 것이다.
2절에서는 그런 사람들과 이방인 선교를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충돌이란 대적과 마주서서 노려보는 모습이다. 왕에게 반역을 일으킨 자들이 왕과 마주서서 노려보는 모습과도 같은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와 짝을 이루는 논쟁이라는 말은 그렇게 마주서서 노려보면서 말로 싸우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성도들과 그렇게 격렬한 논쟁을 벌인 것이다.
이렇게 논쟁이 격렬해지자 안디옥 교회 바울과 바나바를 다른 성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11:22절에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개종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었다. 이제 이미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의 문제를 가지고 바나바를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낸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3절이 1-5절의 중심부분이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1절과 5절에 있어 3절을 가장 바깥쪽 앞 뒤에서 감싸고 있다. 2절은 예루살렘으로 파송했다는 내용이고 4절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환영했다는 내용이다. 2절과 4절이 3절을 안쪽에서 감싸고 있다.
3절은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서 그들에게 이방 사람들이 회개한 일을 이야기한 내용이다. 개역에서는 다녀간다로 번역했고 새번역은 거쳐간다로 번역한 말은 사도행전에서 주로 복음 전하는 여행을 한 경우에 쓰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일행은 이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의 조언을 구하러 가는 길을 이방인 선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널리 알리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이야기했다는 말은 아주 철저하게 설명하고 안내했다는 뜻이다. 페니키아의 회중들은 유대인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보다 이방인 선교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페니키아에 있는 크리스천들은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했던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에 의해 세워졌을 것이다. 아직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던 선교 초기이기에 바울 일행이 가르치며 다닌 이 지역 교회들은 이방지역에 살던 유대인 중심의 교회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방지역에 살고 있었기에 이들은 이방인 선교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보다 더 열린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페니키아와 사마리아에 있는 성도들은 유대인들 중심이었지만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자들이기에 그렇게 철저하게 설명하고 안내한 것이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소식은 그곳 성도들을 매우 기쁘게 했다고 했다. 그곳 성도들은 이방인 선교에 대해 바울 일행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들은 함께 공감하며 기뻐했던 것이다. 모든 족속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소식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성도들이 취해야 할 태도이기에 이 부분의 중심에 두고 전한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보고하기 전에 두 번 예행연습을 한 셈이다. 사실 모든 교회가 이 두 지역의 교회들처럼 다 함께 기뻐했어야 옳다. 예수께서 분명히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는 자신들이 본래 갖고 있던 유대교의 가르침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역하던 사람들과 자신들이 갖고 있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대조가 된다. 오늘날 성도들도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오늘 말씀에 나온 유대주의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