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9-12 바울이라고도 불리우는 사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마술사를 노려보고 그 죄를 지적하며 하나님의 손이 네 위에 있어 한동안 눈이 멀 것이라고 하자 그대로 되었고 총독은 그 일을 보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주님의 가르침에 경탄을 했다.
이전 말씀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에 이끌려 키프로스 섬을 가로질러 총독부가 있던 바보에 가서 총독인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거짓 예언자 바예수는 악한 영에 이끌려 총독이 믿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 마술사를 노려보고 책망하며 눈이 멀 것이라 하자 그대로 되는 것을 보고 총독이 주님을 믿게 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이 사람을 가만두지 않았다. 9절에 보면 사울, 곧 바울이라고도 불리우는 이는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다. 여기서 바울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고 이 후로 사울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을 만난 일을 회상할 때를 제외하고는 나오지 않는다(22:7; 26:14). 그러나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두가지 이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인의 이름은 사울이고 로마인의 이름은 바울인 것이다.
누가는 왜 갑자기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택하기 시작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이제 사울은 이방인 지역에서 주로 복음 전하는 활동을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추측일 뿐 누가가 이름을 바꾸어 쓴 이유를 분명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지금까지도 이방인 지역에서 유대인들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을 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방인 지역에서 유대인들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회당이 없는 곳이라면 유대인들이 모여 기도하던 강가로 나가서 접촉할 유대인들을 찾았다.
10절에 보면 바예수는 속임수와 악행이 가득한 자라고 했다. 가득하다는 말은 9절에서 성령이 충만하다고 할 때 쓴 말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원어는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바예수는 속임수와 악행이 충만했다고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이 충만해서 말했다고 했기에 이는 바울의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바울에게 주신 말이다. 10절에 나온 바울의 말을 보면 상당히 거친 욕들이다.
먼저 속임수(궤계)란 물고기를 잡을 때 쓰는 미끼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작은 미끼 하나 던져서 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항상 한다는 것이다. 서기오 바울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미끼를 던져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어내곤 했을 것이다. 둘째로 악행이란 쉽게 돈을 벌려고만 하면서 게으른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주로 남을 속여서 이익을 얻고 그것으로 편히 살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바예수는 모든 일에 다 그렇게 서기오 바울을 속여 이익을 얻으려고만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바예수를 향해 바울은 셋째로 마귀의 자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마귀 새끼라는 것이다. 넷째로는 모든 정의의 원수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롭게 사는 모든 사람들을 대적한다는 뜻이다. 10절 끝부분에서 주님의 바른 길을 구부러지게 하는 것을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고 했다. 주님의 바른 길이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고 구약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삶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앞에서 말한 네가지 악행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바른 길도 구부러지게 해서 샛길로 빠지게 하는 마귀이다. 그래서 마귀새끼라고 욕한 것이다.
서기오 바울은 지금 진리의 말씀을 따라 곧은 길을 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바예수는 다른 구부러진 곁길로 가야 한다고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마귀가 만든 샛길로 서기오 바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속임수를 당장 멈추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와를 유혹하던 마귀의 모습과도 같기에 앞에서 마귀의 새끼라고 한 것이다.
11절은 원어에서 "그리고 이제 보라" 라는 말로 시작한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새번역은 "주님의 손이 너를 내리칠 것이니" 라고 번역했는데 지나친 번역이다. 원어는 "주의 손이 네 위 있을 것이다" 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손이 바예수의 위에 있어 빛을 가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눈이 멀어서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얼마 동안 이라는 말은 때가 이를 때까지 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까지만 하나님의 손을 그 위에 두어 빛을 못보게 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소경되게 하지 않으시고 얼마 동안만 빛을 못보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사울도 하나님을 대적할 때 역시 일시적으로 소경이 되었다. 사울도 그 기회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다. 바예수도 이 놀라운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기회를 준 것이다.
하나님의 손이 바예수 위에 머물자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내리 덮었다. 처음에는 바예수의 시야가 안개처럼 뿌옇게 되었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완전히 캄캄하게 되어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5:10절에서는 베드로가 말했을 때 삽비라가 즉시 죽었다. 12:23절에서는 하나님의 천사가 즉시 헤롯을 내리쳐서 죽었다. 이처럼 성령님의 역사가 바울이 말하자 마자 즉시 소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즉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는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이다. 그래서 그는 앞을 더듬으면서 손을 잡아 자기를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12절은 총독이 이것을 보고 믿었다고 했다. 바예수가 믿음의 장애물이었는데 그 장애물이 제거되자 분명히 믿게 된 것이다. 서기오 바울은 믿었다고 했는데 침례를 받았다는 말이 없기에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다수는 여기서 믿었다는 말이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침례를 주었다는 말이 없다고 해서 그 믿음이 지속적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믿음만으로 충분하고 침례는 마치 결혼식과 같이 공동체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의식이다. 물론 서기오 바울도 침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을 항상 다 기록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해 중요한 내용만 증언한 것이다. 누가의 초점은 성령 충만한 바울을 통해 악한 영을 굴복시키고 물리쳤다는 것에 있기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12절 뒷부분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다고 했다. 이는 기적을 보고 놀라서 믿은 것은 아니다. 분명히 주님의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총명한 사람이라는 말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서기오 바울은 바예수의 말을 들으면서도 총명한 사람이기에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을 불렀던 것이다. 총독은 누구의 말이 옳은지 분별하려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총독은 바나바와 바울로부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던 것이다.
서기오 바울은 이러한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믿음으로 꽃 피워진 것이다. 기적과 가르침은 한 덩어리 중의 각 부분이고 떼어낼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아도 기적과 가르침은 한 덩어리였다. 마태복음 5-7장에서는 말씀을 들려주셨고 8-11장에서는 그 말씀을 보여준 것이 기적이다. 따라서 기적을 통해 주님의 가르침을 가리던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고 그 다음에 주님의 가르침이 그 마음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 것이다. 서기오 바울이 놀랐던 것은 기적이 아니라 주의 가르침이라고 했기에 단순히 기적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 아니다.
유대인인 바예수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 주님의 가르침을 대적했다. 그러나 반대로 이방인인 서기오 바울은 양쪽의 말을 다 듣고 어떤 쪽이 진리인지 분별했다. 그래서 서기오 바울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놀란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 바예수의 반응과 이방인 서기오 바울의 반응이 분명하게 대조된다. 이는 앞으로 바울이 사역하는 동안 유대인들은 계속 주님의 가르침을 대적하고 이방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것을 미리 알려주는 사건이다.
바예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유대인의 대표하는 상징이고 서기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이방인들의 대표하는 상징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한 것도 결국 바예수와 똑같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대적한 셈이다. 오늘날도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여 구부러진 길로 인도한다면 역시 바예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