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1:22-24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보냈는데 바나바는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 내 놓은 마음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 권면했는데 이는 바나바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무리가 주께 더해졌다.
이전 말씀에서는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을 인정했으면서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증 어떤 이들은 유대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했고 어떤 이들은 이방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던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파송한 내용이다.
22절에 보면 이 말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귀에도 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사람을 파견했다.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에 그 사실 여부를 조사를 위해 사도들을 보냈었다. 이번에도 물론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목적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넬료에 관해 베드로가 증언했기 때문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놀랐다면 바나바가 아닌 사도들을 파견했어야 했다.
어떤 이는 바나바를 조사관으로 보낸 것이고 필요하다면 중단시키려고 보낸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의심이나 적대감을 가지고 조사하려고 보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로 파송했한 것이다. 만약 조사관으로 파송했다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보낸 것처럼 사도들을 보냈어야 하고 최소한 두 명 이상을 보냈어야 한다. 조사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증언하려면 최소한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나바 한 명만 파송한 것은 조사하는 것보다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다리 놓는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바나바는 구부로 출신의 유대인으로 그리스 말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조사보다는 그곳의 믿는 자들을 말씀으로 바르게 양육하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바나바를 보낸 것이다. 다수는 바나바가 다리를 놓는 역할로 파송된 것으로 해석한다. 바나바는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올바르게 전달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임무와 동시에 제자들을 양육하라는 임무를 받아 가지고 파견된 것이다. 오늘날도 믿음은 기록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것을 통해 확인되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사탄의 하수인들인 세상의 온갖 악한 영들과 탐욕에 끌려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3절은 바나바가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 바나바가 본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일까? 어떤 이는 변화된 삶이나 영적 은사보다는 대단히 많은 수의 새로운 신실한 개종자들을 본 것이라고 말한다. 눈으로 즉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람 수 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단히 많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바나바가 가서 본 하나님의 은혜란 많은 이방인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모여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을 보고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두가지를 했다고 했다. 먼저 기뻐했다고 했다. 새로 예수를 믿은 이방인들을 보고 율법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따지지 않고 기뻐서 반갑게 맞은 것이다. 둘째는 모든 사람에게 굳센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라고 권했다. 모든 사람들이란 기존의 신자들과 새로 믿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에게 주님을 의지하라는 말은 주 안에 머물러 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주님 밖인 이방 신들에게 나갔다가 다시 주님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 말고 변함없이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굳센 마음이란 말의 문자적인 뜻은 앞에 내 놓은 마음이란 뜻이다.
앞에 내놓은 것이란 말이 빵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면 구약에서 진설병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 바쳐진 진설병처럼 항상 하나님 앞에 바쳐친 마음이라는 뜻이다. 믿는 자의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바쳐진 진설병처럼 되는가? 이는 핍박을 받을 것을 예상하고 한 말이다. 핍박이 올 것이지만 핍박 가운데서도 마음을 항상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항상 주님과 함께 살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라는 뜻이다.
24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새번역과 개역 모두 빼 놓았는데 번역할 때 빼 놓으면 안되는 말이다. 왜 이렇게 기뻐하며 권면했는가 하면 바나바의 두가지 면을 이유로 제시한다. 첫째는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착한 사람이란 사도행전에서 오직 바나바에게만 쓰인 말이다. 이는 단순히 세상적으로 볼 때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착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는 것이다. 바나바는 자신을 공격하고 대적하고 지적질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처럼 한결같은 사랑으로 인내하고 참아주면서 사랑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쁘게 맞으면서 권면한 것이다. 이러한 성품을 가졌기에 4:36절에서도 위로의 아들이라 한 것이다.
볼 때마다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며 가르치려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닮은 선한 사람이 아니다. 바나바처럼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은 남에게 밟히고 욕을 먹고 조롱을 당해도 분노하지 않으며 주님 안에 살면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간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희생을 당하면서도 참는다. 하지만 남을 이용하고 희생시켜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고 그러한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바나바가 기뻐하며 권면한 둘째 이유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이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란 성령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성령님의 뜻에 이끌려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주님의 손이 함께 하는 것이다. 믿음이 충만하다는 말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6:5절에서 스데반도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24절 끝부분은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라고 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어는 수동태이기에 큰 무리들이 더해졌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더해진 객체이고 더해 주신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오늘날도 교회 성장이나 선교지에서 성공적인 선교는 목회자나 선교사가 잘해서가 아니다. Stott도 우리는 기독교 선교의 개념에서 모든 자기 중심적인 자기 확신을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다(Stott, BST, 204). 만약 우리가 했다고 하는 순간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