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3-9 사울이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빛을 보고 엎드렸을 때 예수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지만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알아듣지는 못했다.
이전 말씀에서 분이 풀리지 않은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에 대해 위협하고 죽이려고 식식거리면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커스 여러 회당에 갈 공문서를 달라 했는데 이는 모든 믿는 자들을 다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사울이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빛을 보고 엎드렸을 때 예수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시는 장면이다.
3절에서 사울은 편지를 가지고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빛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뜻하는 것이다. 사울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생각했기에 4절에서 사울은 땅에 엎어진 것이다. 걸려 넘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에서 빛이 비추자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라 생각했기에 즉시 땅에 엎드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에 엎드리는 동작도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땅에 엎드린 뒤에 사울은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은 "사울아" 라는 것이다. 이는 사무엘상 3:4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를 때와 도 같은 부름이다. 빛과 음성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게 두 번 부르신 뒤에 하신 말씀은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것이다.
그러자 5절에서 사울은 "누구십니까? 주님" 하고 물었다. 주님이란 하나님을 뜻하는 말이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빛 가운데 임하신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려 한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도 자신이 누구신지 밝히셨다. 그러나 사울의 질문에 생각지도 못한 답이 나온다. 그것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는 것이다. 원어 그대로 번역한다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예수!" 이다. 출애굽기 3: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마지막에 "예수" 라는 말만 덧붙인 것이다.
사울은 예수는 마땅히 죽어야 할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 여겼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도 모두 다 죽이려고 했는데 도망가자 멀리 다마스커스까지 쫓아온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모세에게 명령했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스스로 있는 자라고 사울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사울은 기절할 만큼 놀랐을 것이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들을 네게 말해 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 일은 역시 내 백성을 인도해 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울은 혼자가 아니었다. 7절에 보면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동행하던 이들은 안전을 위해서 함께 그룹으로 여행하던 이들이고 사울의 수행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급히 공적인 임무를 띠고 다마스커스로 가면서 안전을 위해 함께 갈 사람들을 찾았을 수는 없다. 사람들을 체포해서 데리고 와야 했기에 수행원들을 데리고 간 것이다. 사울은 유대교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 수행원들을 데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간 것이다.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것도 보지는 못했다는 말을 여러가지로 해석한다. 어떤 이들은 수행원들이 들은 목소리는 바울의 목소리이고 바울은 대화 상대도 없이 혼자서 대화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초자연적인 기적은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4-6절은 계속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기에 7절도 예수님의 음성이어야 한다. 만약 바울의 말이라면 어떤 설명이 있어야 한다.
22:9절에서는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빛은 보면서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9:7절과는 반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로 모순이 아니다. 사람들은 특별한 빛도 보고 어떤 소리도 들었지만 알아보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했다는 뜻이다. 예수게서는 바울하고만 의사소통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주께서 하시는 말씀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석한다. 대다수는 빛도 보았고 소리도 들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깨닫지 못한 것으로 해석한다.
누가가 제시하는 문맥을 통해서 본다면 사울을 따라갔던 수행원들은 이 놀라운 기적의 증인들로 등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의 수행원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수행원들도 분명히 소리는 들었지만 그들이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 음성은 사울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기에 증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참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 교회 친교실 앞에까지 와서 목장 예배를 드리는 소리는 들었지만 직접 들어가 참여할 수 없는 외부인과도 같다. 그 일에 대한 증언을 할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울의 회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갑자기 사울에게 역사하신 것이 아니다. 사울의 회심은 스데반이 죽어가는 모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천사와 같은 얼굴로 기도하며 죽어가던 스데반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한 스데반의 모습이 사울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빛과 소리로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은 스데반이 그렇게 죽어가던 이유를 사울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통해 강제로 사울을 변화시키려 하신 것이 아니다. 이미 가슴이 찔려 아픈 가슴을 부둥켜 안고 그것을 감추려고 분노를 터트렸던 것이다. 그러한 사울이 빛을 깨닫고 스스로 반응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인격을 짓밟지 않는다. 오히려 해방시키려 하신다.
8-9절은 스데반 때문에 찔린 가슴과 빛과 음성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으로 인해 고민하며 몸부림치는 사울의 모습이다. 8절에서 사울은 땅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눈을 떴지만 그 눈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동행하던 사람들이 사울의 손을 이끌고 다마스커스로 들어간 것이다. 9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던 사울은 삼일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것은 몸부림치며 회개하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동안 자신이 굳게 믿고 확신하고 있던 믿음이 깨어지고 이제 새롭게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사울은 눈도 막히고 입도 막히고 이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