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36-40 복음을 듣고 기쁨으로 가득찬 에디오피아 내시가 물을 발견하고 빌립에게 침례를 받은 뒤 제 갈 길로 갔고 빌립은 여러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가이사랴까지 갔다.
이전 말씀에서 빌립은 성령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다가가서 지금 읽는 것을 이해하느냐고 질문을 했고 내시의 청에 따라 마차에 올라 그가 읽던 이사야 53:7-8절의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예언한 것이라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복음을 듣고 기쁨으로 가득 찬 에디오피아 내시가 물을 발견하고 빌립에게 침례를 받은 뒤 제 갈 길로 갔고 빌립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가이사랴까지 갔다는 내용이다.
빌립이 이사야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예수라며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36절에서 내시는 길을 가다가 물을 발견하고 "보십시오 여기 물이 있습니다" 라고 외친다. 누가는 8:27절에서 빌립이 주님의 사자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막길을 가다가 이디오피아 사람을 만났을 때 "보라!" 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여기서 내시는 물을 발견하고 기쁜 나머지 "보라! 물이다!" 이라고 한 것이다. 빌립은 이사야를 해설한 것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뒤 침례를 받는 것에 대해 다 가르쳐 준 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기뻐하며 “보라! 물이다!” 하고 외친 것이다.
이 사람이 "내가 침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라는 말은 빌립이 "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이 없다" 라는 말을 전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서는 최고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지만 유대교에서 자신을 받아들였다 해도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었기에 분명히 차별이 있었다. 만약 이 사람이 거세된 사람이라면 신명기에서 금지된 사람이다. 만약 유대교라면 이사야에 근거해서 자신을 받아 주었다 해도 보이지 않는 차별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침례를 받는데 유대교의 차별과 같은 차별이 없다며 기뻐한 것이다. 시편 68:31절에서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라는 말이 성취된 셈이다. Chrysostom은 이 사람의 믿음이 바울보다 훌륭하다고 했다. 바울은 기적을 체험하고 믿었지만 이 사람은 오직 말씀만 듣고 깨달은 뒤에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37절은 후대의 소문자 사본 몇 개와 TR에만 있고 초기 대문자 사본과 절대다수의 소문자 사본에는 없다. 후대의 교회에서 침례 전에 믿음을 확인하는 질문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침례 문답의 내용을 만들어 넣은 것이 확실하다. 새번역 38절은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라고 했는데 원어는 "그가 마차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라는 뜻이다. 그는 빌립이 아니라 36절에서 말한 내시이다. 더구나 마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내시는 자신의 마부에게 마차를 세우라고 명령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물로 내려갔다. 사막이기에 물이 얕았을 것이고 따라서 침수 침례가 아니고 물을 퍼 부었을 것이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반쯤 물에 잠겨 물을 퍼 부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밥티조라는 말은 항상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뜻을 갖고 있고 신약성경에 일관성있게 나타난 것이 침수례이기에 다른 형태의 침례라고 추정할 이유가 없다. 가자 주변의 와디들은 우기에는 물이 가득 찼을 수 있고 유대교의 침례는 완전한 침수침례였기에 이를 의심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 살수례를 주는 교단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근거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밥티조 라는 말은 본래 물에 잠긴다는 뜻이지 물로 씻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사막지역이라 해도 큰 오아시스가 있던 지역들이 있었다. 둘 다 물에 반쯤 잠겼다면 물이 얕다고 해도 침례 받는 사람이 물에 주저 앉거나 누우면 되는 것을 억지로 물로 퍼 부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필자가 침례교 목사라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성경 본문 자체가 말하는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을 퍼붓는 관수례는 박해가 심해지면서 로마의 카타콤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박해 때문에 밤에 몰래 카타콤에서 나와 물을 길어다가 붓는 것으로 침수 침례를 대신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로마에 가면 St. Clement 교회는 중세에 지어진 건물이 맨 위에 있고 그 아래에는 4세기 교회 건물이 남아있다. 맨 아래에는 AD 64년에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는 1세기 교회 유적이 있다. 그 중 4세기 초반의 교회 건물에는 침례탕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물을 뿌리는 세례는 후대 교회의 산물이다. 물론 물을 뿌리는 세례가 그 이전에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초기의 침수례가 핍박으로 인해 관수례가 행해지다가 나중에는 살수례를 행했지만 형편이 되면 침수례를 행했던 것이다.
39절은 "그런데" 라는 말로 연결이 된다. 물에서 올라올 때 성령이 빌립을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데려갔다는 말은 사도행전 34:10절에서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하기 위해 데려갔다고 할 때도 썼다. 엘리야와 같은 기적으로 성령께서 다른 장소로 순간이동을 시키셨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셔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급히 떠났다는 뜻일 수도 있다.
빌립은 계속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면서 큰 기쁨을 나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내시가 큰 고마움을 표시하며 큰 재물을 선물로 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빌립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기에 성령께서 그 내시를 그대로 두고 속히 떠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그 내시는 더 이상 빌립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시는 기쁨으로 길을 갔다고 했다. 이는 성령이 충만하여 어쩔 줄 몰라하며 홀로 가던 길을 갔다는 뜻이다.
이레니우스나 다른 교회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나중에 이 사람은 에디오피아의 선교사가 되었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의 기록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사도행전의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성령께서 빌립을 통하여 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은 에디오피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을 가능성이 높다.
40절에서 "그 뒤에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났다" 라고 했다. 아소도는 가자에서 해안선을 따라 20마일 정도 북쪽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순간이동을 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걸어서 갈만한 거리이다. 아소도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서 여러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가이사랴에 이르렀다고 했다. 빌립은 20년쯤 후인 사도행전 21:8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가이사랴에서 네명의 여자 예언자의 아버지로 살았다고 했다.
가이사랴가 집이기 때문에 가이사랴까지 복음을 전했는지 아니면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집을 얻어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가이사랴는 당시 로마 총독부가 있던 항구도시이고 수많은 헬라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오가던 곳이었기에 그곳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빌립은 평생 예수님의 명령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드나드는 가장 큰 항구도시 가이사랴에서 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