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7:14-21 높고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한결 같은 사랑으로 참으시고 다가오셨기에 그 사랑에 감격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눈물 닦아 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찬양하게 하신다.
하: 위로의 하나님
나: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해서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와 위로를 받는 한해가 되길 소망한다.
이전 말씀에서는 세상에 속한 우상들을 음란하게 섬기는 자들을 자세히 묘사하며 망할 것이라 했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라 했다. 이제 오늘 말씀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도와주신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14절은 돌아오는 길을 건설하고 나의 백성들이 돌아오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라고 했다. 이는 포로로 잡혀간 유다사람들이 실제로 돌아오는 길을 건설하라는 뜻이 아니다. 계속해서 영적인 정결함의 회복을 비유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이다.
8:14절에서 하나님께서 걸림돌이 되시겠다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음란하게 세상을 의지하던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시지만 14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의 백성" 즉 진정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려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편안히 나올 수 있도록 높은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걸림돌은 다 치워서 편안히 하나님께로 나오도록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
15절은 원어에서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어째서 하나님께서 14절에 말한 것처럼 그렇게 세심한 사랑의 배려를 해 주시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높으신 하나님께서 낮은 자들과도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15절은 하나님을 세가지 초점으로 설명을 한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신학적으로 가장 잘 설명한 구절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첫번째 초점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한다. 하나님은 높이 계시고 높이 들림 받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하나님은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또 그분의 이름 자체가 거룩이다. 이름 자체가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항상 거룩한 곳에 거하신다는 뜻이다. 높고 영원하시기만 하면 하나님이 아니다. 그분은 항상 거룩한 곳에 거하시는 분이어야 한다.
두번째 초점은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라는 것이다. 두번째 초점은 사실 모순이다. 하나님께서는 높고 거룩한 곳에 영원히 계신다면 낮은 이 땅에 있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계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번째 초점은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겸손한 사람이라는 말은 낮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의 영혼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이다. 또 회개하는 사람들의 상처는 치료해 주신다는 것이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아선다는 하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사람들의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마음의 상처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16절은 어떻게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인간들과 함께 계실 수 있는지를 말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끝없이 다투지만은 않는다" 라고 했다. 새번역의 어감은 원어와는 조금 다르다. 원어를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과 영원히 다투시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또 분을 품지도 않으신다고 했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투고 분을 내신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견디겠냐는 것이다.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거룩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한결 같은 사랑으로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고 그 아들을 믿는 자들은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시기 때문이다.
17절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또 참으시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신 것은 "사람들의 탐욕 스러운 죄"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죄를 깨달으라고 치신 것이다. 분노하셔서 그 얼굴을 가리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분노하신 것은 바로 탐욕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디모데전서 6:10절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다. 골로새서 3:5절에서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다. 이는 단순한 과장법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죄의 근원을 분명하게 요약한 것이다.
또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깨달으라고 치시면 그 때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려주면 도로 미끄러져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다시 자기들 마음의 탐욕을 따라 걸어갔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사사기 이후의 모든 역사서들에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세상 것들을 사랑하고 음란하게 세상을 섬겼던 것이다.
18절은 이처럼 끊임없이 도로 제자리로 돌아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말한 것이다. 예상되는 답은 싹 다 쓸어 완전히 없애버리셨어야 했다. 놀랄만한 내용이 이어진다. "사람의 소행이 어떠한지 내가 보아서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고쳐 주겠다"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고쳐준다는 말은 버르장머리를 고쳐준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상처를 치료해 준다는 뜻이다. 치료하신 후에는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계속 미끄러져 다시 탐욕의 길로 떨어지는 인간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셔서 바른 길로 가게 해 주신다는 뜻이다. 마지막은 우는 자들을 위로하시겠다는 것이다. 우는 자들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말도 안되는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서서 우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안아주시고 위로해 주신다는 것이다.
19절 첫부분의 "내가 말로 평화를 창조한다" 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면서" 라는 뜻이다. 18절 끝부분의 "위로하여 주겠다" 라는 말과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위로하여 주겠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면서" 라는 뜻이다. 입술의 열매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입술의 열매를 주셔서 찬양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 입술의 열매는 바로 이어지는 "평화, 평화, 먼곳에 있는 사람들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라는 말이다. 평화를 두번이나 외친 것은 완전한 평화를 외치며 찬양하는 것이다. 먼곳에 있는 사람들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란 온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내가 너를 고쳐주마" 이다. 울며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을 하나님은 치료해 주신다는 것이다.
높고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탐욕으로 가득한 더러운 인간들과 함께 하실 수 있나?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만큼 거룩해져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참고 또 참으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가 다 탐욕을 따라 사는 죄인들이다. 단 한사람도 예외는 없다. 그런 우리의 죄악을 참고 또 참으시며 다가오셨고 마지막에는 그 아들까지 보내서서 그 아들을 믿는 자를 구원하시겠다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대로 완벽하게 살아서 거룩해지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그 한결 같은 사랑에 감동을 받았지만 자신의 죄를 어찌할 줄 몰라 울고만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다가와 그 눈물을 닦아 주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해 높고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말씀의 참 뜻을 가르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다. 이런 놀라운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의 입술에도 "평화 평화" 를 외치는 찬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나오면 누구든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고 외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