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5:6-13 말씀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불러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만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비를 내리시듯 말씀을 차별없이 내리셔서 결실하게 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 말씀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나: 하나님의 명령을 죄인들에게 전하여 돌아오게 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자.
이전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종 메시야께서 값을 치르셨으니 값없이 하나님께 나와서 생명의 양식을 먹으라고 했다. 이제 메시야를 통해 전해지는 생명의 양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그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다.
2절에서는 들으라고 했고 3절에서는 귀를 기울이고 와서 들으라고 했다. 이제 6절은 2개의 명령이 짝을 이루고 있다. 먼저 주님을 찾으라고 명령한다 언제? 발견될만한 거리에 계실 때이다. 찾으라고 하니까 믿는 자가 주도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가까이 다가오신 것이다. 고개만 들면 발견될 거리에 와 계신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종이 전하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이와 짝을 이루는 댓구는 "주님을 불러라" 이다. 이번에는 눈을 들어도 보이지 않는 경우이다. 그런 때에는 주님을 불러보라는 것이다. 주님이 가까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다. 발견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그런 때는 부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가까이 와 계신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어린 자녀 곁에서 지키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혼자서 놀다가 "아빠 어디있지?" 라고 생각이 들면 눈을 들어 보는 것이다. 눈에 보이면 안심하고 다시 논다. 그런데도 눈에 안보이면 "아빠!" 하고 불러서 찾는 것이다. 그러면 아빠가 나타나 "아빠 여기있다" 라며 안아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고개들어 찾으라고 한 것이고 소리쳐 부르라고 한 것이다.
7절은 먼저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라고 했다. 여기서 버리라는 명령어는 3인칭 명령어이다. 2인칭 명령어는 듣는 상대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이지만 3인칭 명령어는 명령을 들어야 할 사람이 그 자리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게 하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게 하라" 라고 번역해야 한다. 악한 자란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기에 길을 버리게 하라고 한 것이다. 길은 행동을 나타낸다. 이와 짝을 이루는 말은 불의한 자이다. 불의한 자는 악행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악한 생각을 품고 있는 잠재적인 악인이다. 그렇기에 이런 사람에게는 생각을 버리게 하라고 한 것이다.
악한 자와 불의한 자에게 이런 말씀을 전해야 할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에게 있다. 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악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에게 전해야 할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가서 악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에게 전하라고 주신 말씀을 가서 전해야 하는 것이다. 전해야 할 말은 "주님께 돌아오너라" 이다. 역시 가서 "주님께 돌아오너라" 라고 전하라는 말씀이다.
악한 행동과 악한 생각까지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버지 앞에 있던 형이 아버지 말씀을 듣고 가서 악한 행동과 불의한 생각을 갖고 살던 동생에게 전하는 모습과도 같다. 형은 가서 "아버지께서 널 돌아 오라고 하셔!" 라고 전할 것이다. 그러면 악한 일을 한 동생은 혼날까봐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 악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예수님께서 목자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사람들을 보고 블쌍히 여기신 마음과도 같은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이다. 어째서 잘못을 따지거나 벌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실까? 53:6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의 종에게 우리 모두의 죄악을 지우셨기 때문이다. 53:9절에 보면 하나님의 종이 대신 고난을 받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라고 전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용서가 가능할까? 사람들은 이런 용서를 할 수 없다. 아들을 대신 죽게 하시고 아들의 원수들을 자녀 삼아 주시겠다고 부르시는 아버지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때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구해 아들 삼아 키운 손양원 목사가 바로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을 보여준 사람이다.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지만 그런 용서를 받아 자녀가 된 사람은 그런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런 사랑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기에 8절에서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라고 한 것이다. 앞에서는 악인의 길을 먼저 말하고 생각을 나중에 말했는데 하나님의 행동인 길과 하나님의 생각은 반대의 순서로 말한 것이다. '악인들의 길: 악인들의 생각::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길'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진짜 차이는 생각에 있는 것이다. 위선자들은 하나님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산상 수훈에서 행동으로 드러난 범죄보다 마음 속의 생각을 강조한 것이다.
9절은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한 것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사람들처럼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갚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까지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인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죽게 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사람들의 길과 생각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10절은 죄인들에게도 차별없이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와 눈에 비유한 것이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들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은 모두에게 차별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비처럼 차별없이 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심을 씨앗과 먹을 양식을 주신다는 것이다.
11절은 그 비유에 대한 해설이다.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라고 했다. 내린 비가 땅을 적시고 바다로 흘러가서 증발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에 주목하면 안된다. 초점은 심을 곡식과 먹을 곡식을 주신다는 것에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말씀을 주신 목적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12절은 "참으로" 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원어에서는 "왜냐하면" 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잘 연결이 안되기에 참으로 라고 번역한 것이다. 개역이나 개역개정은 의미가 통하지 않기에 삭제해 버렸다. 이는 10-11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비처럼 모두에게 내려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근거를 설명한 것이다.
12절은 "너희는 기뻐하면서 바빌론을 떠날 것이며 평안히 인도받아 나아올 것이다" 라는 말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빌론의 포로에서 석방된다는 것에 초점을 두면 성경을 잘못 읽는 것이다. 초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하시고 인도하신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의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과도 같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 산과 언덕이 너희 앞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며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다" 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제 하나님께서 회복된 땅에 함께 하실 것이기에 산과 언덕이 소리높여 노래하며 들판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을 친다는 것이다. 산과 언덕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돌아오는 앞에서 가면서 군악대처럼 음악을 연주하고 찬양을 하며 나아가는 모습이다. 들판의 모든 나무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진에 박수를 쳐주는 모습이다. 돌아오는 백성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시며 모든 사람들과 모든 땅을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13절은 땅이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말한 것이다. 그 땅은 본래 가시나무만 자라던 황량한 사막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잣나무(cypress)가 자라게 하신다는 것이다. 또 찔레나무도 역시 사막에서 자라는 쓸모없는 식물이다. 그곳에 화석류(myrth)가 자란다고 했다. 화석류라고 번역된 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초막절에 쓰는 나무이다. 형태가 아름답고 향이 좋아서 관상수로 심는다. 결혼식 행렬의 맨 앞에서 이 나무의 가지를 들고 흔들며 춤을 추기도 한다. cypress 나무가 쓸모있는 재목이라면 이 나무는 아름답고 향기가 나는 나무이다. 하나님께서 사막을 이렇게 아름다운 땅으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가시나무와 찔레나무는 사막에 나 있는 식물들로 죽음과 고통을 상징한다. 그러나 잣나무와 화석류는 둘 다 항상 변함없이 푸른 잎을 내는 상록수들이다. 이러한 상록수들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속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어서 설명한다. "이것은 영원토록 남아 있어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증언할 것이다" 라고 했다. 원어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만든다. 멸망하지 않는 영원항 상징으로" 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도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만 이런 축복을 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엑 복음을 전해서 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명령이고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만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제자 삼으라고 하셨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고난 가운데 살지만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