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12-16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는 말을 들은 무리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의 나라를 회복시켜줄 왕으로 기대하며 환영행사를 벌였지만 예수께서는 농부가 타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고 이는 스가랴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제자들 조차도 예수께서 영광 받으신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이전 말씀은 큰 무리들이 유대사람들 중에 나와서 예수님과 나사로를 구경하러 와서 보고 믿게 되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도 죽이려고 계획을 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다음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무리들이 환영하는 장면이다.
12절은 “다음 날에는” 라는 말로 시작한다. 앞에서 마리아가 예수께 값비싼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한 그 다음 날이란 뜻이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알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준비를 하러 들어가시는 것이다.
바로 그날에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요셉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대로마 전쟁 바로 직전 유월절에 2,700,000의 사람들이 참여했다고 되어있다(War. 6. 422-25).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부정한 자들과 외국인들을 제외한 숫자라니 정확히 세 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세가지를 했다. 그 세가지 동작이 13절에 나온다. 첫째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유월절에 관한 기록에는 유월절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라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구약 외경인 마카비 1서 13:51절에 보면 예수님 시대 이전인 기원전 141년에 마카비가 시리아 군대를 예루살렘에서 몰아냈을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려나무 가지를 든 것은 유월절 때문이 아니라 마카비처럼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유대를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흔든 것이다. 다수의 주석가들은 이처럼 종료나무 가지를 흔든 것은 마카비 시대 이후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며 흔든 것으로 해석한다.
둘째는 그분을 맞으러 나갔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동작은 과거에 단 한번으로 끝난 동작이다. 그러나 세번째 나오는 소리쳤다는 말은 계속 반복해서 소리쳤다는 뜻이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이라고 계속 반복해서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의 호칭이다. 또 이스라엘의 왕이라 했다.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으로 오셔서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해방시켜 달라는 외침이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목격한 자들이 중심이 되어 예수님을 환영한 것이다. 예수님이 유다 마카비처럼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고 이스라엘을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라 믿고 환영한 것이다.
14절은 원어에서 “그러나” 라는 말로 시작한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도 이 말을 뺏거나 아니면 ‘and’ 로 번역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이러한 환영과는 반대로 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라고 했는데 어린 나귀를 찾다가 드디어 발견했다는 뜻이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찾으신 뒤에 제자들에게 데려오게 하신 것이다.
어린 나귀를 찾으신 이유가 어째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환영에 반대되는 것일까?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지도자로 환영한 것이다. 그렇다면 커다란 군마를 타고 입성하셔야 맞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어린 나귀를 찾으셔서 타셨다. 나귀는 일을 하러 갈 때 농부들이 타는 것이고 평화의 때에 타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군사적인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무리들은 유다 마카비 같이 또 옛날 다윗왕의 모습과도 같이 커다란 군마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농부들이 타는 작은 나귀를 타고 우스꽝 스러운 모습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무리들은 실망하고 또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즉흥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기록된 내용은 스가랴 9:9절의 인용으로 15절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시온의 딸이란 예루살렘 주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정복자가 군마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 많이 있었다. 정복자가 들어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기에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정복자가 아니라 너희 왕이 오시기 때문이다. 그것도 왕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기 때문에 전쟁 때가 아니라 평화의 때라는 것이다.
16절은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라고 했다. 원어는 이 말씀이 아니라 ‘이것들’ 이다. 단순히 스가랴의 말씀을 몰랐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과 스가랴의 말씀을 연결시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로 기대하고 따라 다녔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왜 말을 안타고 나귀를 타셨는지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스가랴 9:9절의 성취라는 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신 후에야 이것들을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가랴 9:9절에 기록된 말씀이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사람들도 그렇게 대하였다” 라는 말은 기록된 그대로 예수님께 행해졌다 라는 뜻이다. 기록된 그대로 행해졌다라는 것을 기억해내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의 역사이다. 요한복음 14:26절에 보면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성공하며 영광을 누리길 원한다. 그러한 마음이 구한말 어려운 시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를 통해 어려움을 당한 한국 사람들에게도 전통 무속신앙이 깊이 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기독교를 무속신앙처럼 만들어버렸고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는 그렇게 어려운 시기에 크게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단지 잠깐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와 같은 삶에서부귀영화를 누리도록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 아니시다. 그 분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이 땅에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