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54-57 예수께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을 전지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시고 충돌을 피해 에브라임이라는 곳으로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지명수배를 내렸다.
이전 말씀에서 가야바는 예수 한 사람이 죽어 모든 유대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것이 유익이라며 예수를 죽이자 했고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이에 동의하여 예수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에브라임에 가서 지내자 유대 사람들은 명절에 예수가 나타나면 알려달라는 명령을 내려두는 내용이다.
54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이어진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으므로 라는 뜻이다. 이어서 깜짝 놀랄 내용이 나온다. 이어지는 내용은 예수께서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로 더 이상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에서 떠나 광야에서 가까운 지방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가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다고 했다. 이게 왜 깜짝 놀랄 일인가 하면 산헤드린 공회의 결의는 공회원들끼리만 아는 비밀결의이다. 그런데 저들이 결정한 것을 예수께서 다 아시고 에브라임 지방으로 가셨다는 것은 기적이다. 예수님께서 초자연적 지식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디에나 다 계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과 늘 동행하시며 소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광야에서 가까운 지방의 에브라임이라는 마을이라 했는데 마을이라는 말은 원어에서는 도시이다. 그러나 큰 도시가 아니기에 개역은 동네로 번역했고 새번역은 마을로 번역했다. 의역을 주로 하는 NIV나 NLT도 Village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원어는 분명히 도시를 나타내는 폴리스이다. 도시와 마을의 차이는 오늘날처럼 인구가 많이 밀집되어있는 차이가 아니다. 요새화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폴리스이고 아무런 성벽이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면 마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NASB는 원어 그대로City로 번역했고 ESV는 그 중간인 Town으로 번역했다. 그렇기 때문에 에브라임은 성벽이 있는 도시인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동북쪽 방향에 있는 곳으로 북왕국의 예배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아주 가까운 곳이지만 걸어서 다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다기 보다는 예수님을 믿고 보호해 줄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서 잠시동안만 안전한 곳이라는 뜻이다. 광야에 가까운 곳에 있는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는 것은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복음서에서 광야는 항상 예수께서 무리들을 피해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장소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55절은“유대사람들의유월절이가까이오니” 라고했다. 나님께서보내신어린양이죽을때가가까웠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요한은유월절이가까이왔다는말을통해하나님의어린양께서죽으실때가가까이왔다는것을암시하고있다. 그래서 긴장감은 한층 더 고조된 것이다.
55절 뒷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을 성결하게 하려고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시골이라고 번역한 말은 사실 지방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앞에서 에브라임 도시라고 한 말과 반대가 되는 말로 성벽이 없는 마을들을 뜻한다. 특히 이는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두고 한 말이다. 이들은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이방지역에서 살다가 왔기에 유월절 전 한 주간 동안 예루살렘에 와서 정결례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뜻이다. 그래야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를 찾고 있는 모습이다.
56절도 ‘그러므로’ 라는 말로 이어진다. 유월절이 가까워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북적이게 되었으므로 라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를 찾다가 성전 뜰에 서서 서로 말하였다” 공회원들은 사람들을 시켜서 비밀리에 예수를 찾아 보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에서 성전 뜰에 서서 대화하는 장면이다. 공회원들은 주로 성전 뜰에서 모여 모임을 갖고 대화를 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가 명절을 지키러 오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오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은 올 것이라는 질문이 아니다. 원어에 보면 부정어를 두번이나 썼기 때문에 올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의 질문이다. ESV나 NASB나 NIV는 “at all” 이라는 말로 이중 부정어를 살려서 질문으로 번역했다. 문맥은 분명 의심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따른다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와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기에 율법을 어기더라도 설마 오겠느냐며 절대로 안 올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57절에서 공개적으로 지명수배를 내린 것이다. 이제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제 어떻게 해서든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에 대해 요한은 이제 유월절 양으로 오신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가 가까웠다고 암시하고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예수께서는 에브라임이라는 한적한 도시로 가셨다. 이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무서워 피난을 가신 것이 아니다. 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제자들을 양육하는 일에 집중하고 계신 것이다.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우리 역시 사람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삶으로 본을 보여주며 말씀으로 훈련시키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