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38-40 예수께서 분노하시며 무덤으로 가셔서 돌을 옮기라고 하자 마르다가 벌써 나흘이나 되어 완전히 죽었고 썩어서 냄새가 난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네가 만약 믿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하지 않았느냐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일부 유대사람들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라고 했고 일부는 미리와서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느냐고 빈정거렸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이러한 빈정거림에 분노하시며 무덤으로 가셔서 돌을 옮기라고 하자 믿지 못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는 네가 만약 믿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하지 않았느냐고 하시는 내용이다.
38절도 원어에는 ‘그러므로’ 라는 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사람들이 빈정거리는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다” 비통하게 여기셨다는 말은 33절과 똑 같은 말이다. 비통하게 여기셨다는 말이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 “다시 비통하게 여기셨다” 라는 말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수많은 기적을 보고 그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다시 분노하셨다는 것이다.
38절 뒷부분은 무덤은 동굴인데 돌로 막아 놓았다고 했다. 돌로 막았다는 말은 원어에서 돌을 위에 올려놓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동굴은 수직으로 뚤려있는 것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KJV나 RSV는 원어 그대로 “upon it” 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들은 수평으로 된 동굴로 보고 “against it” 으로 고쳐 번역한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동굴이 수평일 수도 있고 수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직인 무덤일지도 모른다며 전통적으로 인정되는 나사로의 무덤은 사다리로 내려가는 수직 무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나사로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곳들은 관광객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고 진짜라고 확인할 수 없다.
평범한 유대인들은 자연적인 동굴을 가족의 무덤으로 삼아 동굴의 큰 방에서 사방으로 다시 굴을 파고 거기에 각각 하나씩 시신을 넣어두고 돌로 막았다. 이런 경우에는 큰 방까지는 수평이지만 거기서 나뉘어지는 각각의 무덤들은 수직일 수도 있고 수평일 수도 있다. 부자들의 경우에는 바위를 수평으로 파서 굴을 만들고 각자 자신만의 무덤을 만들었다. 나사로의 무덤은 수직의 동굴 위에 돌을 올려놓았을 수도 있고 수평인 동굴 앞을 돌로 막아놓았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39절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다. 원어는 돌을 굴리라고 하지 않고 치우라는 뜻이기에 이 돌은 사각형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돌을 굴리라고 하시든 치우라고 하셨든 그 말을 근거로 그 돌아 사각형이었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예수께서는 말로는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에 이제 돌을 치우라 하시며 기적으로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그러자 39절에서는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죽은지가 나흘이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난다고 대답했다.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 라는 말에서 죽은 사람이란 완전히 죽은 사람이란 뜻이다. 요한은 이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영혼이 떠나는 시간인 사흘이 지나 나흘이 되었기에 완전히 죽었기에 살아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런 말씀 쓴 것이다.
27절에서 마르다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한 것이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것이 여기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다면 무덤 문을 열라고 했을 때 즉시 열었어야 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어려서부터 배운 유대인들의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미 영혼이 떠났고 부패하기 시작했기에 완전히 죽었다고 마르다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는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40절에서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라고 하셨다. 이러한 말은 11:4절에서 마르다가 없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한 말이기 때문에 마르다에게 한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모든 말씀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니다. 23-26절에서 마르다에게 다른 말로 풀어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고 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네가 만약 믿고 무덤 문을 연다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는 기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영광을 보게 되는 마르다의 믿음이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오는 모습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며 마르다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4절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주제를 반복하신 것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의 목적을 상기시켜 준다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의 표징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목격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던 예루살렘의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탄의 능력 정도나 신비한 마법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들만이 나중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한 뒤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영원히 사시는 영광의 몸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 역시 장차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