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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섭 목사Dr Ahn's NT OT

새벽말씀 › 요한복음 › 11:1-6

Dawn Word

요한복음 11:1-6

사람들의 요청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

어둠 속에 펼쳐진 말씀과 빛 · 요한복음 1장

2024. 4. 17. · 안정섭 목사 · 요한복음 11장 강해 설교

요한복음 11:1-6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 아들과 함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하시며 그러므로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틀이나 그곳에 더 머무셨다.

이전 말씀은 예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피해 요한에게 침례를 받던 곳으로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요한이 증거한 말이 참되다며 예수님을 믿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나사로가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지체하시는 장면이다.

10장 끝부분에는 많은 사람들이 침례 요한의 증언이 참되다며 예수님을 믿는 모습이 나왔다. 이들은 예수님의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이었다. 11:1절은 ‘그런데’ 라는 말로 시작하며 “한 병자가 있었는데” 라고 한다. 그 병자의 이름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다. 나사로도 역시 예수님의 양이라는 뜻이다. 또 베다니는 마리아와 그의 누이인 마르다의 마을이라 했다. 이렇게 세 사람을 모두 소개하는 이유는 이 세사람이 모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예수님의 양들이었기 때문이다.

2절은 마리아를 소개한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는 장면은 12장에 나오는데도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어준 여자라고 소개한다.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이미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을 사랑한 마리아가 바로 병든 나사로의 누이라는 것이다. 이 가족이 예수님과 얼마나 사랑하는 관계였는지 말해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들을 사랑하고 이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3절은 나사로가 아팠으므로 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라고 전했다. 두 자매는 나사로가 예수님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일부 학자들은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을 근거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나사로라며 나사로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제자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 복음의 다른 곳에 나오는 사랑하시는 자 라는 표현은 아가파이다(요 13:23; 19:26; 21:7, 20). 그러나 나사로의 경우는 필레이스이다.

그러나11:5절에서는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했다는 말에서는 아가파를 썼기에 필레이스와 아가파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는 제자라는 말이 사용된 곳의 문맥을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19:26절에는 예수님의 모친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는 장면이 나온다. 또 21:7절에서는 베드로가 사랑하시는 그 제자와 함께 있다가 바다로 뛰어 내리는 장면도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 사랑하시는 자는 사도 요한이다.

11:3절에서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는 말은 전 후 문맥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전 후 문맥은 예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나사로는 예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양들 중 하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두 자매만 사랑할 뿐 아니라 나사로까지도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주님의 양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랑하시는 형제인 나사로가 아프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요단강 건너편 북쪽으로 가셨을 것이라 했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 해도 걸어간다면 최소한 이틀은 걸리는 거리이다. 이렇게 먼 곳으로 피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낸 것은 나사로가 정말로 위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먼곳에 계신 예수님을 부르면 즉시 달려올 것으로 믿고 사람을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나사로와 두 자매는 예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양이고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10:15절에서 말한대로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이다.

4절은 “그러나” 라는 말로 이어진다. 즉시 달려가실 줄 알았는데 그러나 뜻밖에도 가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이다. 9:3절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이번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 하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 앞에 보이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어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 것이다. 이는 10:30절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라고 하신 것과 연관된 말이다. 또 10:38절에서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 말과도 연관된 말이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하나이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이심으로 함께 영광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라는 또 다른 증거를 11:4절에서 찾을 수 있다.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한 사람은 최소한 이틀은 걸려서 예수님께 왔다. 그렇다면 아직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고 하셨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일이다.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기에 나사로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아신 것이다. 이것도 놀라운 기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는다는 말은 또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기도 하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 기적은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암시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부활이 아니라 소생이다. 영원한 몸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 건강을 회복한 것 뿐이다.

5절은 갑자기 “예수께서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라고 했다. 사랑하셨다는 말은 계속해서 사랑하고 계셨다는 뜻이다. 3절에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 먼곳까지 사람을 보내 나사로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릴만큼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준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 셋 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양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키는 것이다.

6절은 원어에서 “그러므로” 라는 말로 이어진다. 사랑하는데도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에 새번역은 영어의 NIV를 따라 ‘그런데(yet)’ 라고 의역을 한 것이다. 하지만 원어는 마르다의 가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그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다” 는 것이다. 새번역은 또 “들으시고도” 라고 했고 개역개정도 “들으시고” 라고 의역했는데 원어 그대로 “들으셨을 때” 이라고 해야 한다.

사랑하셨으므로 이틀을 더 머무셨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사랑한다면서 죽어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NIV 번역자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원어는 분명히 사랑하셨으므로 그 소식을 들으셨을 때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는 뜻이다. 성경 본문이 이해가 안된다고 고치면 안된다. 이해가 안되고 말이 안되면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품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틀을 더 기다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당장 와야 한다고 했겠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셨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때도 어머니의 요청에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셨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틀을 더 기다리는 것이 마르다의 가족들에게도 진정으로 복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요청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양들을 사랑하시던 분이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양들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시려고 시범을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대로 들어주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역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의 뜻에 따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양들을 사랑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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