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2:7-12 평화와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이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다스리실 것이니 부정한 곳에서 떠나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라. 주께서 인도하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하: 인도하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
나: 이제는 세상 탐욕에서 완전히 떠나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라가도록 하자.
이전 말씀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게 스스로 먼지를 털고 일어나서 스스로 목에 매인 사슬을 풀고 존귀한 옷을 입고 존귀한 자리에 앉으라 하셨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임을 알라고 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그 이름을 알고 그 말씀 하시는 것을 안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
7절은 "놀랍고도 반가워라!" 라는 말로 시작한다. 원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은 산을 넘어오는 발이다. 그런데 발은 사람의 신체 중에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다. 샌들을 신고 달렸기에 땀에 젖고 흙이 잔뜩 묻은 발이다. 그 발이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감탄을 하는 모습이다.
그 발은 먼저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라고 했다. 원어는 "소식을 갖고 있다" 라고 한 뒤 "평화!" 라고 한다. 소식을 갖고 있다고 하면 그게 뭔데? 라고 물을 것이다. 그 때 "평화!" 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 다음는 "복된 희소식을 외치는구나 구원이 이르렀다고" 라는 말이 나온다. 앞부분과 똑같이 "소식을 갖고 있다" 라는 말에 "좋은" 이라는 말 한마디 덧붙인 것이다. 번역자가 풀어서 번역하다보니 그 리듬이 깨져 버렸다. 원어의 1절은 이런 노래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을 넘어오는 발이! (왜 아름다운데?)
소식을 갖고 있다. (무슨 소식?)
평화!
좋은 소식을 갖고 있다. (무슨 좋은 소식?)
구원!
그리고 시온에게 말한다.
"너의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평화란 이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다. 이는 마치 적들에게 포위가 되어 성 안에서 굶주리며 떨고 있던 백성들에게 전쟁이 끝났다고 외치는 소식과도 같다. 바빌로니아에게 지배를 받으며 고통 가운데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제 바빌론은 망했기 때문에 이젠 평화가 왔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구원이다. 구원의 소식을 전한다는 말은 역대상 16:23절에서도 나온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부른 노래이다. 시편 96:2절도 같은 노래이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 계셨는데 이제 다시 예루살렘에 오셔서 시온 산에 앉으신다는 것이다.
이 보다 더 좋은 소식은 "너의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라는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도 더 좋은 소식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예루살렘을 다스리신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는 것이다. 원문은 이렇게 세 줄의 노래가 점점 더 큰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2절은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의 소리를 들어 보아라" 라고 했다. 산을 넘어 달려내려오는 사람을 파수꾼들이 먼저 본 것이다. 사무엘하 18:24절에 보면 이처럼 소식을 전하는 자가 달려오는 모습을 파수꾼이 먼저 본 모습이 자세히 나와있다. 어처럼 파수꾼들이 먼저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소리를 높여서 기뻐하며 외친다" 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 라는 말이 1절에서 구원이라는 의미를 설명한 말이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바빌론으로 잡혀갈 때 주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셨다. 그런데 그 포로들이 돌아올 때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 오시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실 것이니 좋은 소식인 것이다.
9절은 "함성을 터트려라 함께 기뻐 외쳐라" 라고 한다. 파수꾼들이 성 안쪽으로 돌아서서 그 소식을 전해주는 모습이다. 그러자 성 안의 모든 백성들이 함성을 터트리는 모습이다. 그런데 함성을 터트리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 이다. 다
부서지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 안의 건물들에게 외치라는 것이다. 어째서 폐허가 된 건물들이 마치 사람들처럼 기뻐 외친다고 했는가? 이는 그 백성들이 회복될 것을 건물이 회복되는 그림으로 상징화시켜 표현한 것이다. 그 기쁨의 소식은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다" 라는 것이다. 예루살렘 주민들을 위로해 주셨고 속량해 주셨다면 그들이 돌아와 무너진 예루살렘을 다시 세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기뻐하고 있는 것은 이제 곧 하나님께서 돌아와 예루살렘을 다스릴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칼빈도 이 모든 기쁨이 기대감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변한 것은 없다. 아직도 헐벗고 굶주리고 있고 폐허가 된 건물들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회복될 것을 확신하기에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소식도 이와 같다. 이미 하나님께서 승리하셨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소식이 확정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아직도 고통 가운데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주님 다시 오셔서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사실 것을 확실히 믿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10절은 "주님께서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하신 능력을 드러내시니"
라고 했다. 원어는 주님께서 그 거룩하신 발로 안으시니 그 모습을 모든 이방 나라들이 본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안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땅 끝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안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고 계시는 모습은 우리의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고 계시기에 그렇게 한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드러내서 우리를 안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해야 하는 것이다.
11절은 먼저 "너희는 떠나가라 그곳에서 떠나 나오너라" 라고 했다. 떠나가라는 말은 옆으로 비켜 멀리 떨어져 서라는 뜻이다. 부정한 것에서 먼저 돌아서서 떨어지는 것이 먼저이다. 그 다음은 그곳에서 완전히 떠나 나오는 것이다. 이어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 가운데서 나오너라" 라고 했다. 아무것도 만지지도 말고 얼른 그 가운데서 나오라는 것이다. 또 주님의 그릇을 운반하는 사람들이란 레위인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으실 텐데 우리가 부정하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없기 때문이다.
12절은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너희 앞에 가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너희 뒤를 지켜 주시니 너희가 나올 때에 황급히 나오지 않아도 되며 도망치듯 달아나지 않아도 된다" 라고 했다. 이제는 쫓겨 도망치는 신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만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함께 앞서 인도해 주시고 뒤에서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고 그 지켜 주심을 믿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영원한 몸을 입고 부활하여 우리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살 것이다. 그 기쁜 소식이 이미 확정되어 전해진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먼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세상의 더러운 탐욕과 부정한 것에서 완전히 떠나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를 향해 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