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4-15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자신은 모세가 뱀을 높이 든 것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림으로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니고데모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것도 모르냐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증언하시는 것을 자신은 말한다며 땅의 일을 말해도 믿지 않는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이 높이 들려야 한다는 것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에 비유하신 말씀이다.
14절에서 예수게서는 니고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반드시 들려야한다고 하셨다. 여기서 든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었는데 이는 주로 낮은 자를 높여준다고 할 때 쓰는 말이다. 예수께 쓰였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는 것을 말할 때 쓴 말이다(행 2:33; 행 5:31; 빌 2:9; 사 52:13).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어올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 높이 들어올리는 비유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높이 올린다는 말이 그렇게 쓰인 적이 없다. 요한복음에서는 3:14절에서 두 번 나오고 다른 곳에서 세번이 나오는데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는 것에 쓰였다(요 8:28; 요 12:32, 34).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높이 들어 올리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높인다는 말이 하나님 우편으로 승귀를 뜻할 수 있고 유대인들도 인자를 그렇게 존귀하게 높여야 한다는 말을 받아들이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높이신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파격적인 말씀은 메시야는 유대인들의 손에 십자가에 높이 달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니고데모로 대표된 유대인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높이 올리셔서 자신들의 왕으로 자신들을 구해주고 잘살게 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높이 달려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마치 모세가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았을 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살아난 것처럼.
마태 마가 누가복음 기록자들은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일시적인 불연속으로 이해하지만 요한은 창세전 아버지와 함께하셨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 십자가에서 높여지는 것으로 성취되었다는 뜻으로 증언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높여 지신 예수님은 그를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니고데모가 전혀 이해 못하자 이 땅에서 육신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는 것이라고 앞에서 설명하신 것이다. 이 땅 위에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고 해도 믿지 않는데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를 바라보고 믿는 사람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면 믿겠느냐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이번에는 모세가 구리뱀을 든 것을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죽어야할 죄인들이 예수를 바라봄으로 새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구리뱀의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위로부터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15절은 14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원어에서 15절은 그 결과 그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올려지신 것이 바로 그를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 구리 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새생명을 얻었지만 다시 죽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사람들은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Carson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이 두 단어가 예수는 구리뱀과 전혀 다른 카테고리 안에 둔다며 열왕기하 18:4절에 보면 구리뱀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마법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취급했기에 결국 히스기야 왕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했다(Carson, 202).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구리뱀에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셨지만 구리뱀을 보고 살아난 사람들과 예수님을 보고 살아난 사람들은 전혀 다르기에 구리뱀을 본 사람들처럼 일시적인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덧붙여서 설명하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높여진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왕이나 대통령 같은 존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높이신 것은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살려 처형되는 것은 벌거 벗겨진 채 죽임 당하고 버려지는 것이고 가장 낮아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을 가장 낮은 존재로 낮추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는 구세주로 높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섬김의 본을 보이신 본보기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